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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정약용-청복 열복

옛 문헌에 적혀 있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五福이라 했습니다.

수壽 ... 오래 살아 천수天壽를 다하는 것.

부富 ...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

강녕康寧 ...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평안한 것. 강康은 육체적 건강, 녕寧은 마음의 건강을 말함.

유호덕攸好德 ... 덕德을 그윽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고종명考終命 ... 죽음에 임해 고통없이 평안한 상태로 생을 마치는 것.

오래 살아 천수를 누리고, 사는데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재물을 소유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주변에 덕을 베풀고, 고통없이 평안하게 임종하는 것, 선인들은 이를 일러 복이라고 했습니다. ​첨언하면, 이 다섯가지 바람은 양반으로 위시되는 상위 계층의 소망이었고 민간의 소망은 이와 다소간 차이가 있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수, 부, 귀貴, 강녕, 자손중다子孫衆多를 오복으로 쳤습니다. 유호덕은 귀로, 고종명은 자손중다로 대체된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에게 귀한 신분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손이 잘되고 번성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

세간에서는 치아건강을 오복 중의 하나로 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치아건강이 몸 전체의 건강과 연관이 깊어 세 번째 항목인 강녕을 그렇게 표현했겠지요. 사는 동안 복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렇다면 선인들은 어떤 복을 구했을까요? 조선시대 문집 <소은고>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선비 세 사람이 하늘나라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각자의 소원을 말했다. 첫 번째 선비는 큰 벼슬아치가 되는 소원을, 두 번째 선비는 큰 부자가 되는 소원을 말했다. 옥황상제는 난색을 표하지 않고 선선히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은 선비는 앞의 선비들이 소원했던 부귀와 공명을 다 싫다고 단박에 부정하면서 시골에 묻혀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기 바란다는 소원을 말했다. 하나도 특별하달 것 없이 어찌 보면 가장 평범한 소원이었다.

뜻밖의 소원을 듣고서 한참만에 옥황상제가 답했다. 그가 소원한 것은 이른바 청복淸福으로서 그런 복은 하늘도 정말 아껴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도 옥황상제 노릇을 벗어던지고 그런 삶을 살고 싶노라고 덧붙여 말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이에 대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복이란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대장 깃발을 세우고 관인을 허리에 두르고 풍악을 잡히고 미녀를 끼고 놀며,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초헌을 타고 비단옷을 입고, 대궐에 출입하고 묘당에 앉아서 사방의 정책을 듣는 것, 이것을 두고 열복熱福이라 한다.

깊은 산중에 살면서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맑은 샘물에 가서 발을 씻고 노송에 기대어 시가를 읊으며, 마루 위에는 이름난 거문고와 오래 묵은 석경(악기), 바둑 한 판, 책 한 다락을 갖추어 두고, 마루 앞에는 백학 한 쌍을 기르고 화초와 나무, 그리고 수명을 늘리고 기운을 돋우는 약초들을 심으며, 때로는 산의 승려나 선인仙人들과 서로 왕래하고 돌아다니며 즐겨서, 세월이 오가는 것을 모르고 조야의 치란을 듣지 않는 것, 이것을 두고 청복이라 한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오직 각기 성품대로 하되, 하늘이 매우 아끼고 주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청복이다. 그러므로 열복을 얻은 이는 세상에 흔하나 청복을 얻은 이는 얼마 없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 선인들은 열복보다 청복을 참된 복으로 여겼습니다. 선인들이 즐거워 한 것은 대체로 돈 안 들고 별로 특별할 게 없는 것들입니다. 느긋하게 독서하기, 단정히 앉아 고요히 말없이 있기, 산수 자연 속을 한가로이 거닐기, 평상에 앉아 거문고 타기, 친구와 담소 나누기, 꽃 가꾸기, 차 마시기... 이런 것들이 즐거움의 종류로 빈번히 손꼽혔습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책을 읽는 것으로 사람이 속된 기운을 떨어내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복? 청복? 아니면 내 지기 친구가 말한 바, 열복과 청복의 적당한 조합?사람들은 너나없이 세속적 성공을 갈구합니다. 종사하는 분야에서 괄목 업적을 성취하고, 높은 직위에 올라 명성을 드러내고, 충분한 부富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우선 머리입니다. 재능이라고 말해도 되겠지요. 다음에는 노력.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행운이 따라야 합니다. 운 좋은 사람이 성공하는 법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성어가 괜히 생겼겠습니까.

재능 노력 행운, 이 모두를 갖춘 이가 얼마나 될까요? 백에 하나? 그런데 이 모두를 갖춘 3관왕이라 하더라도 원하는 것 모두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열 개 중 일곱 개를 얻으면 베스트입니다. 소위 '열의 일곱 규칙(seven-of-ten rule)'입니다. 하물며 3관왕이 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야 일러 무삼하겠습니까.

세상 사는 동안 전부를 얻는 이도, 전혀 못 얻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약간 더 얻고 약간 덜 얻으며 살아갑니다. 행불행을 가르는 것은 자기가 얻은 것에 자족하며 사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그 차이일 뿐입니다. 혹여 주위에 제법한 성공을 이뤄 부러운 이가 있다고요? 그렇다면 가만히 그를 살펴볼 일입니다. 그 역시 갖추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완벽하게 갖춘 이, 완벽하게 행복한 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