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분량이 적정해야 읽을 맛이 난다. ‘노자’처럼 분량이 너무 적으면 말이 워낙 압축적이라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반대로 ‘관자(管子)’처럼 너무 많으면 읽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럼 ‘장자’는 어디에 속할까? ‘장자’ 또한 일단 분량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사실 읽고 싶어도 쉽지 않다.
‘장자’가 ‘관자’에 비해 읽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관자’의 말은 비교적 직설적이다. 하지만 ‘장자’의 언어는 온갖 상징과 비유로 넘쳐난다. 혹여 ‘장자’라는 책의 명예 때문에 인내심을 발휘해 책을 어렵사리 읽어나간다 해도 자신이 읽은 부분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는 게 만만찮다. 특히 ‘제물론(齊物論)’에 이르면 몇 번이나 꼬아서 말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스스로의 지성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제 내용이 흥미롭다는 명성 못지않게 읽기 어렵다는 악명이 높은 ‘장자’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장자’는 첫 구절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공자와 손자, 맹자는 ‘논어’ ‘손자’ ‘맹자’의 첫 구절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하지만 ‘장자’는 메시지가 아니라 이야기로 시작한다. ‘장자’가 어렵다는 말에 사람들은 처음엔 잔뜩 긴장해서 책을 펼친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읽곤 피식 웃으며 다소 긴장을 풀면서 장자를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北冥有魚).”
‘장자’의 첫 구절이다.
“이름이 곤(鯤)이고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 큰 물고기다. 그 곤은 가만히 바다에서 놀며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붕(鵬)이라는 새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서서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물고기가 물고기로 있으면 그만이지 도대체 왜 새로 변신을 시도할까?
장자는 이런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곤에서 붕으로’의 변신(鯤化爲鵬)을 신나게(?) 묘사한다. 붕은 변신 이전의 곤처럼 크기가 수천 리나 되고 날개를 펼치면 하늘이 까맣게 변해버리는 새다. ‘붕새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크다’는 말이다. 변신을 끝낸 붕새는 자신이 살던 북쪽 바다를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남쪽 바다(南冥)로 날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붕새가 워낙 크다 보니 쉽게 남쪽으로 날아갈 수가 없다. 나뭇잎 배는 접시 물에도 떠다니지만 큰 배는 그것을 받칠 만한 물이 필요하듯 붕새가 날아가려면 그만큼 강한 바람이 있어야 한다. 강한 바람이 생기기 위해선 붕새가 9만 리나 날아오를 공간이 필요하다. 그만한 공간이 있어야 붕새가 큰 날개를 휘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붕새는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
옆에서 보던 비둘기는 붕새의 이런 비행을 이해할 수가 없다. 비둘기는 같은 지역에서 살며 번식하는 텃새이므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멀리 가려고 하지 않는다. 비둘기는 가만히 있지 않고 편한 공간을 벗어나는 붕새의 비행을 부질없는 일로 본다.
이야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곤은 무엇이고 붕새는 무엇이며 붕새로의 변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장자가 그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솝 우화는 짧고 함축적이지만 읽고 나면 어느 정도 의미가 짐작이 된다. 장자는 이솝 우화와 마찬가지로 우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정작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하지 않다.
변신이라는 코드에 초점을 맞춰 장자의 우화를 읽어보자.
곤이 붕새로 변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곤은 입이 새의 주둥이로 뾰족하게 툭 튀어나오고 배가 날개로 길게 늘어나서 펼쳐지는 등 몸이 뒤틀리고 휘는 고통의 과정을 거친다. 변신은 이처럼 살을 찢고 몸을 비트는 듯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이뤄진다.
곤이 붕새가 되는 변신은 예쁜 얼굴을 가져다주는 성형처럼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곤은 평소 무슨 아픔을 겪었기에 변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무엇인가 득 보는 것이 있어야 변신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 성형은 변신 이후 ‘예쁘다’는 얘기를 듣지만 곤의 변신은 비둘기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냉대를 받을 뿐인데 왜 변신을 하는 것일까?
이 물음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선 전국시대 상황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던 전국시대엔 자기 보존이 최우선 과제였다. 중앙집권 관료 국가는 이전의 종족 공동체 체제와 달리 국민에게 새로운 권리와 의무를 조정해 집행했다. 국가는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국민에게 군역과 요역 등 각종 노동력을 수취하고 토지 세금, 특산물 제공 등 새로운 의무를 끊임없이 지시하기 시작했다.
국가 입장에서는 언제 강대국의 침입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강한 군사력이 필수였다. 필요한 자원을 세금 형식으로 징수하고 새로운 사업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국민 입장에서 보면 종족 공동체보다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에서 사는 것이 훨씬 힘들다. 점점 많은 임무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국가’라는 새로운 기구에 대해 ‘제자백가’라면 누구라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앙과 한비 등은 군주를 중심으로 국부(國富)를 극대화해야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국가가 자기 보존의 원칙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는 선의 기구라고 생각했다.
반면 공자는 결국 사람이 국가를 운영하므로 지도자가 자기 절제의 덕과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도자에 따라 국가는 공공선을 실현할 수도 있고 사욕을 실현하는 기구가 될 수도 있다.
장자는 국가에 대해 상앙처럼 희망을 갖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공자처럼 견제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장자는 시시각각 개인에게 부과되는 요구와 의무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장자’의 ‘소요유’ 첫 편에 나오는 ‘곤이 붕새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이런 뜻을 담고 있다.
변신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욕구 중 하나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늘 ‘여행’을 꿈꾼다. 사람들은 평소 자신이 생활하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누린다. 성형도 마찬가지다. 외모 콤플렉스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성형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삶에서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 성형뿐 아니라 전직, 취미 등을 통해 자신을 다르게 가꾸려고 한다.
장자의 변신은 자신의 모습을 a에서 b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이는 여행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성형처럼 몸의 일부만 고치는 것도 아니다. 물고기에서 새로 바뀌는 것처럼 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다 근원적인 변화다. 이 변신에는 어떤 장애나 한계가 없다. 이렇게 종을 넘어서 변신하면 국가는 ‘나’의 종적을 추적할 수가 없다. 국가가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곤’을 찾아왔지만 그 곤은 벌써 ‘붕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으로부터 규제를 받는다. 늘 자신을 얽어매고 삶의 관행에 따라 같은 패턴을 항상 되풀이한다. 불편하고 지루하다고 느끼면서도 규제, 욕망 그리고 관행이 주는 안정감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장자는 고통이 따르는 변신을 위해선 용기를 내야 함을 강조한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각자의 존재는 삶의 크기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자유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온몸에 변신을 불가능하게 하는 갑각류와 같은 딱딱한 투구를 쓰고 사는 것은 아닐는지.
출처 : 매경헬스(http://www.mkhealt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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