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신현상학』 제4장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나'(Ich, I)를 '나'로 의식하는 근거인 '자기의식(들)'이 같은 자기의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균등한 형태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관념론적 관점에서 묘출하기 위해 제시된다.
순전히 추상적으로 보면, 자기의식은 대상들을 '나'로서 '부정'할 수 있을 때 확인된다. 그러나 헤겔은 각자의 자기의식이 나의 진정한 자기의식이려면 '타인이 나에게 하려고 드는 행위'와 '나 스스로 하는 행위'사이에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즉 자기의식은 단순히 '나'가 갖고 있는 자연적 의식이 아니라, 타자의 행위와 자기 행위 사이의 '관계'에서 나의 행위가 '우세'할 때, 바로 그 때, 나의 것으로서 확실하게 확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의식은 나의 것을 부정하려고 드는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에서 ― 헤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 "자기자신의 목숨을 건", 또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나'가 "자기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받을 때만 가능하다. 즉 자기의식은 투쟁을 통해 자기의식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바로 이렇게 "다른 의식과의 매개를 거쳐" 자신의 "자립적 존재"와 아울러 사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그런 형태의 자기의식을 헤겔은 "주인"으로 형상화시켰다. 당연히 "노예"는 이런 인정투쟁에서 오직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을 담보로 자기의식으로서의 자립성을 인정받는 데 실패하고 비자립적 상태에서 일종의 "사물적 존재"로, 나아가 사물들을 직접 마주하는 존재로 전락한 의식의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전적으로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역전될 계기를 그 안에 내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즉 주인은 그 본성상 '노예'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사물'과 관계하며, 이 사물을 단지 "향유"할 뿐이다. 이에 반해 직접 사물을 가공해야 하는 노예는 이 사물이 대상으로서 갖는 자립성을 체험하는 가운데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면서 그 스스로가 자립적 의식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삶의 과정에서 주인은 자기의 존재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예라는 타자에 의존하면서 비자립적 의식을 갖게 되고,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립적 의식을 획득하면서, 주인과 노예의 의식상태는 '역전'된다. 따라서 주인됨과 노예됨이 상호연관되어 역전과 반전이 교착하는 그 상태는 자기의식이 결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아주 불안한 상태이다.
주인과 노예를 관건용어로 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제4장은, 특히 사적 유물론을 강하게 염두에 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고전적 해석 이래, 주인과 노예 사이의 직접적 지배-복종-관계가 극복되면서 노예가 해방되는 혁명적 과정을 관념론적으로 파악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20세기 후반기 철학에서 헤겔 철학을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와 그 극복에 관해 해방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홍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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