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고흐의 눈, 고갱의 눈

흔히들 사람들은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이라는 말로 고흐와 고갱을 부른다.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은 1888년 11월, 고갱이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담 삼아 한 말인데, 그 말이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고흐와 고갱을 구분할 때 사용하게 될 줄은 고갱도 몰랐을 것이다. 
-p.4 ‘서문’ 중에서

 20 개의 키워드로 비교한 고흐와 고갱의 시선과 관점 
 고흐와 고갱은 왜 탈진하도록 싸웠는가
 
   고흐의 눈, 고갱의 눈은 반 고흐와 폴 고갱의 공동 작업을 중심으로 두 화가가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친 책입니다.
  1세대 큐레이터 박우찬 미술평론가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양 미술사에 크고도 강렬한 변화를 일으킨 반 고흐와 폴 고갱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저자는 전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반 고흐와 증권 브로커 출신의 폴 고갱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반대로 대립하는 지점에 주목했습니다. 반 고흐와 폴 고갱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천사와 악마의 그것처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데요, 자신도 평생 가난에 시달렸음에도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도움을 주던 반 고흐와 세계 대공황이 닥치기 전까지 증권 브로커로 활동하면서 세속적이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폴 고갱의 대립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게 달랐던 두 예술가는 시시각각 충돌했고 매 순간 대립했습니다.
  이 책은 가난한 무명 화가 두 명의 삶 전체와 주변 인물들까지 조망하면서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유명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습니다. 또한 후반에는 반 고흐와 폴 고갱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 모더니즘의 흐름까지 담겨있습니다.

가난한 두 명의 무명화가,
세계 미술사를 바꾸다!

 -고흐와 고갱의 비슷한 꿈다른 생각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무명의 가난한 아마추어 화가였던 두 사람이 각각 꿈꾸고 있던 ‘화가 공동체’에서 출발했습니다. 고흐의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팔고, 그 수입금을 공동생활과 작업에 다시 사용하는 방법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비슷한 개념이었습니다. 반면, 고갱은 후원자로부터 기금을 후원받아 화랑을 세운 후, 화가들에게 작품을 기증받고, 기증한 작가는 무료로 화랑에서 전시 판매하는 상업적인 형태의 예술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출발 지점부터 서로 달랐던 그들의 ‘화가 공동체’에 대한 꿈은 서로의 각기 다른 필요성을 토대로 아를에서의 동거로 이어졌습니다. 고흐에게는 자신의 꿈에 동참해줄 동지이자 동료인 고갱의 존재가 절실했으나 여관비를 내지 못해 작품까지 압류당한 고갱은 고흐 형제가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자신의 작품까지 팔아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고흐의 제안을 수락했을 뿐이었습니다.
고갱을 애타게 기다렸던 고흐는 행여 고갱이 노란집에 실망해 빨리 떠날까 봐 노란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라마르틴 광장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고갱의 방을 배정하고, 바닥에는 고갱이 좋아할 고급스러운 카펫을 깔았습니다. 고갱을 고상한 시인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시인의 정원 the Poet’s garden(1888)」 연작과 「해바라기」 그림들로 고갱의 방을 장식했습니다.



-60일간의 동거파국으로 끝을 맺다
이런 고흐의 애정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고갱은 아를에 도착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 고흐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너무 다른 생활방식과 예술관으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하는데, 공동생활이 2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두 사람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1888년 12월, 고갱이 머지않아 아를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흐는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고흐의 정신분열증 증세가 나날이 악화하는 가운데 고흐와 같이 지내는 일은 고갱에게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12월 23일, 고흐와 고갱이 공동 작업을 시작한 지 꼭 두 달째가 되던 날 밤, 고흐는 고갱과 다툰 후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잘라냈습니다. 사건 다음 날, 고갱은 간단한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도망치듯 아를을 떠났고 고흐는 아를의 시립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에게 그들의 이별의 의미는 서로 달랐습니다. 고갱에게 고흐와의 이별은 단순한 헤어짐에 불과했다면, 고흐에게 고갱과의 이별은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예술 공동체라는 꿈의 종말이었습니다. 고흐가 정신분열증 속에서 자신의 귀까지 자른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견디기 힘들었던 고갱과의 이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 vs 고갱의 ‘눈’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 파국을 맞은 가장 큰 이유는 전혀 다른 성장 배경에 의해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벽하게 달랐던 두 사람의 성격과 세계관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출신 성분과 자라난 환경, 타고난 성격의 차이로 인해서 고흐와 고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동작업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봅니다. 고흐에게 유일한 친구인 조셉 룰랭과 술을 즐겨 마시던 아를의 ‘밤의 카페’는 자신이 쉴 수 있는 단골 카페였습니다. 그러나 고갱의 눈에 비친 ‘밤의 카페’는 술꾼과 접대부들로 가득한 ‘악의 소굴’에 불과했습니다. 밤의 카페를 운영하는 지누 부인은 고흐에게는 지혜롭고 교양있는 중년 여인으로 보였지만 고갱에게는 술꾼들의 피를 빠는 뚜쟁이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생활방식도 두 사람은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수도승처럼 검소했던 고흐는 거울이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물건일 정도로 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최고의 사치가 담배였고 군화 같은 작업용 신발만을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고흐는 늘 농민 화가를 꿈꿨으며 자신을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라고 생각했고, 그런 고흐의 취미는 독서, 편지쓰기, 논쟁, 산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원래 귀족주의일 수밖에 없다”라 생각하며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실직하기 전까지 부유한 중산층으로 살았던 고갱의 취미는 악기 연주, 펜싱, 시 낭송과 같은 귀족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눈’을 가진 고흐와 고갱의 작품은 당시 기성의 미술 화풍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다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지만, ‘둘의 예술세계와 그들의 작품’이라는 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고갱은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하였다. 우리는 분명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고흐는 고갱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습니다. 고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 「시인의 정원」과 같은 걸작들을 그려냅니다. 고흐는 고갱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그렸고, 그 결과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냅니다. 또 고흐는 고갱의 영향으로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 그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고갱은 애써 고흐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고흐에게서 감정을 담아 강렬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으며, 자신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굳건히 다지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이들의 공동 작업은 19세기 후반, 사진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미술을 구하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길을 닦는데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흐와 고갱의 예술은 1905년 야수파(Fauvism), 1910년 표현주의(Expressionism), 1916년 다다이즘(Dadaism), 1925년 초현실주의(Surrealism), 그리고 최종적으로 비기하학적 추상미술(Non-Geometrical Abstract Art)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탄생에 기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