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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아들러 융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정신과 개원의 중 한 명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는 1895년 『히스테리 연구(Studies of Hysteria)』를 발표하고 1900년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정신분석 사례를 토론하거나,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임인 ‘수요회’를 결성했다.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 루 살로메(Lou Andreas Salomé, 1861~1937년) 등의 문화예술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수요회는 점점 더 활성화되었다.

어느덧 정신분석은 유럽 전역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며 중요한 학문이자 치료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의 지지자가 되거나 제자가 되었다.

칼 아브라함(Karl Abraham, 1877~1925년),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년),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 1873~1933년), 오토 랑크(Otto Rank, 1884~1939년), 알프레드 어니스트 존스(Alfred Ernest Jones, 1879~1958년) 같은 이들이 핵심 멤버였다.

하지만 빈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모임은 유럽 전역을 아우르지 못했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소수민족인 유대인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 발전의 한계로 작용할 것을 절감한 프로이트는 적극적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이때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년)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프로이트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리고 스위스 출신에, 목사의 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년)가 운영하는 ‘부르크휠츨리’라는 명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융은 1906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론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어연상검사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구름’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때 만일 ‘하늘’이라고 답한다면 자극이 된 ‘구름’을 듣고 대답하기까지의 시간차를 정교하게 측정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게 대답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와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이고 지나치게 성(性)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았던 프로이트에게 융의 단어연상검사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제자 아브라함에게 “융의 지지가 훨씬 귀중하네. 오로지 그가 나타났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유대인의 민족적 관심사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융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등한 자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교수님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등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더욱 친근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기꺼이 여겼다.

프로이트는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처음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융을 선출할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즉, 공식적으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프로이트의 생각대로 되는 듯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신기해하면서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빈 출신 유대인의 비기(秘技)로 인식되던 정신분석이 유럽 전체에서 받아들여졌고, 미국에서 프로이트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정신의학에서 정신분석의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제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스승의 이론에 의구심을 가지며 자기만의 깃발을 세우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되는 이들이 나왔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아들러였다.

아들러는 18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유대인이었다. 빈 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되었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모임의 초기 멤버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기에 은연중에 빈에서는 2인자로 인정받았다.

1902년에 매주 수요일 저녁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수요회가 1908년 정식으로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을 맡았다.

프로이트도 아들러를 아껴서 1906년 아들러가 처음으로 발표한 ‘신경증의 심리학적 근거’에 대한 논문이 자신의 이론과 차이가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모두 정신질환의 원인은 유전과 환경이 공동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생각은 유사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기관열등성(Minderwertigkeit)’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생물학적 기반이 열등한 경우 신경증이 더 잘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어릴 때의 외상경험이나 정신성발달을 중요시했다면 아들러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사회나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어린 시절의 정신성발달이 인격형성의 핵심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들러는 열등성(inferiority)을 더욱 파고들었다.

사람은 타고난 기질적 불완전성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발생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고, 이 과정에 실패하면 신경증 증상이 생긴다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었다.

이런 와중에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창립되면서 융이 회장으로 선임된 것은 정치적으로 아들러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가 아들러를 중심으로 한 빈 그룹을 배제하고, 스위스 출신의 비(非)유대인 융을 선출한 것은 아들러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융을 종신 회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결국 빈 그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대신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다시 빈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으로 밀었지만, 국제 학회가 아닌 지역 학회를 맡으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초기 멤버로서 그 역할과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러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피터 게이(Peter Gay)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깔끔하고 귀족적인 사람으로 환자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아들러는 옷차림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이고 민주적이며 환자의 상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성향 차이가 환자를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런 아들러의 태도를 못마땅해한 것 같다.

프로이트는 아들러가 정신분석의 중요한 요인인 리비도를 평가절하하고 심리적인 측면보다 생물학적 기관열등성에만 천착한다고 생각해 갈등을 빚었지만, 빈 그룹의 일부는 아들러의 이론이 정신분석을 넓히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들러가 1911년 「신경증의 핵심 문제인 남성적 저항」을 발표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프로이트는 “아들러는 자신과 다르며 추상적이고 익숙한 개념을 새로운 이름으로 얘기할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무의식과 성욕을 무시하고 심리학을 생물학과 생리학에 종속시키려 한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1911년 2월 말 아들러는 빈 정신분석학회 회장과 ≪정신분석 중앙 신문(Zentralblattfür psychoanalyse)≫의 편집인을 그만두었으며, 마지막으로 학회 사퇴서까지 냈다. 같은 해 가을, 아들러를 지지하는 여섯 명이 학회에서 축출되면서 아들러와 프로이트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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