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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새마을 운동 독농가연수원



1. 새마을운동의 시작동기


   1968년 시작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과 1970년 농한기(1970년 10월~1971년 6월)에 전국의 33,267개 마을마다 지원된 335포대의 시멘트 지원으로 실시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성과분석 결과. 사업 성패의 결정적인 요인은 사업을 이끌어가는 선도자에게 있음이 확인되었다. 새마을 운동을 거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이 운동을 선도해 나갈 지도자 양성이 선행되어야 하겠다는 최고 통치자(박정희 대통령)의 결심이 서게 되었다.


1. 독농가연수원 설립


새마을운동을 선도해 나갈 지도자 양성을 선행 해야겠다는 방침에 따라 이 교육기관을 이끌어 나갈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을 발굴 선임하고 1972114일 농협중앙회의 잠정기구로 독농가 연수원을 설립했다. 교육은 전국의 140개 시군에서 선발된 140명의 독농가 교육으로 시작 하였으나 동년 73일부터 새마을지도자교육으로 전환하게 되었다새마을 남자지도자들에 대한 교육이 확실한 성과를 거두자 수료생들은 부녀지도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 했고 다음에는 새마을운동 유관 기관단체 임직원들의 교육과 국무위원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지도층 교육까지 확대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시작한 교육기관은 늘어나는 교육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각시도의 공무원연수원과 정부의 기관 단체, 민간 기구, 기업체에서도 자체 연수원을 갖고 새마을 교육을 하게 되었다.

새마을교육이 이러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 이면에는 최고 통치자의 의지와 신념에 버금가는 집념과 철학을 가진 인사(초대 원장 김 준)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이끌어가면서 남녀 새마을지도자들과 각계사회지도자들의 동참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인 추진력을 부여한 것은 새마을운동의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


2. 적합한 교육환경과 교육시설


입지 조건 : 일상적인 생활영역에서 적정거리로 격리된 지역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고 사색에 몰입할 수 있는 경 관이 좋은 지역으로 전 환경을 교육장으로 활용하는데 적합해야 한다.


: 산속의 명당 지역, 호수 인접 지역, 안정 적인 도서 지역 등


조건 : 연수생의 수송과 외래 강사의 출입에 어려움이 없는 지역

교과진행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 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지역

한국의 사례 :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의 경우

독농가 연수원(농협대학 시설 공용. 1972.01.14~1973.04.08)

서울 서북 근교, 고양군 원당면, 서삼능 유적지와 서삼능 목장이 위치한 전원 지대에 위치한 농협대학 구내에 창설 되었으나 농협대학과 농협 임직원 연수원과 같이 제반시설을 공용함으로서 새마을교육 시설로의 기능적 공간적 제약이 적지 않았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수원 농민회관 임대사용. 1973.04.08~1983.04.02)

수원 소재 농촌진흥청 구내 깊숙한 서호 변에 위치하여 여기산과 후면 농지가 좋은 경관을 유지해 주었으나 건물이 고층(10)건물로 연수생들이 불편을 느끼게 되고 원래 교육시설로 설계된 시설이 아니므로 교과진행에 한계가 있었으며 경부선 철도에 인접하여 철도차량 소음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서호의 호수와 아침 구보를 했던 서호 변 도로는 연수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제공해 주었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 성남 (1983.04.06~현재)

새마을교육 시설은 합숙교육을 위주로 하는 성인 사회교육 시설로서 교육전문 시설인 대학 캠퍼스와도 다르고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호텔 시설과도 다르다. 새마을교육이 세계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교육방법인 것처럼 시설도 그 기능에 적합한 새로운 유형이 필요 했다. 그래서 7년간 교육에 종사 했던 교수가 주축이 되어 소상한 교과진행 과정을 기술한 Academic-Plan을 수립한 다음 전문 설계사와 합동으로 Master-Plan을 완성한 새로운 유형의 새마을교육시설을 태동시켰다. 이 연수원이 준공 된 후 용인소재 경찰대학, 양평 소재 KBS 연수원, 천안 소재 교보연수원 등에서 참고했었다. 197910.26 사태이후 새마을운동의 영속화를 위해서는 자체 연수시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정부방침(1979.12.06 내무부 장관 구자춘)에 따라 한수 이남 13개 후보지 중 현 위치로 최종 선택했다(1980.05.01)


3. 새마을지도자는 물이어라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김준 초대원장 강의에서-

새마을지도자는 물의 진리를 익히고 물처럼 행세하자고 호소했다.

물은 몸을 나추고 낮은 데로 쉼 없이 흐른다. 물은 끓여도 얼어도 본질을 잃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물은 형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컵에 담으면 컵 모양, 병에 담으면 병 모양으로 모든 형식을 포용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요, 만물의 기본원료가 된다. 술에도, 약에도, 모든 생명체의 몸에도.......

물은 적은 틈새라도 빠져 나간다. 적은 가능성이라도 길이 있으면 택한다.

물은 힘겨운 바위는 돌아 나간다. 물은 힘이 약할 때는 힘이 찰 때까지 기다리고, 여럿이 힘을 모아 뚝이라도 무너뜨린다. 물은 오수를 정화하고 오물을 쓸어 깨끗하게 청소한다. 물은 청탁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수용한다.


4. 과정별 교육실적 (기간 : 1972130~1981125)



새마을교육이라는 용어 문제다. 교육이란 일반적으로 지식이나 교양, 기술 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새마을교육은 그것과는 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연수에 참여하는 사람(연수 대상자)들은 그들 분야에서는 비교적 높은 수준에 있는 지도급(선도자 위치) 인사들이기 때문에, 교육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말 대신 (硏修)’라는 단어를 상용(常用)했다.


새마을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락에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 모여 가지고 좋소, 합시다, 해도 부락민들의 앞장에 서서 밀고 나가는 훌륭한 지도자가 없어가지고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성공한 부락은 전부가 이러한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한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두 사람, 세 사람이 복수로 그 부락의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일한 예도 있었습니다.

그 부락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그 부락민들에 대한 신망이 두텁고, 또 설득력이 있고,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그러한 지도자라야만 부락민들이 따라 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 훌륭한 부락의 지도자를 우리가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이 새마을 운동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성패의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1972518일 광주 새마을소득증대촉진대회 박정희 대통령 치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연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교육요원)들의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자리 잡아 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교육자라고 하면 다소 상위개념 같은 것을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연수요원들은 연수에 참여한 분들이 편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자기성찰의 경지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와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instructor)이 주()된 역할이기 때문에 자신이 교육자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했던 것이다.

또 새마을연수는 연수원에 종사하는 한정된 원내 교수와 자체요원에 의하여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고, 원외의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외래강사로 동참했던 것이다.

 

1. 새마을 연수(교육)의 태동

 

1) 가나안농군학교 김 용기 장로

 

우리 중근대사를 볼 때 농촌농민교육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뜻있는 선각자들에 의하여 한정된 문하생을 양성하는 데 국한되었지만,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최 용신(채 영신) 여사와 김 학준(박 동혁) 박사 등이 일제하에서 농민교육을 통한 국민자각운동을 해 온 것이 역사 속의 유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마을교육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1962년부터 일가(一家) 김 용기(1912-1988) 장로님이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에서 해온 가나안농군학교 농민교육사례가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김 용기 장로님은 잘 알려 있는 바와 같이 약관 22세부터 이상농촌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 오신 분으로 막사이사이 사회공익상까지 받으신 분이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김 장로께서 시도해 오신 여러 가지 계몽(복음)활동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기신 사업으로 지금도 대를 이어 외국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시작할 때부터 김 용기 장로님을 중심으로 아들, , 며느리, 사위 등 가족들이 교육을 직접 담당했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교육이념에 따라 근로, 봉사, 희생정신을 기독교 신앙생활에 바탕을 두고, 인격도야와 선교활동, 민족정신 함양을 해 오고 있었다.

교육대상자는 청소년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특히 잘사는 농촌을 건설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으며. 교육방법은 전 교육요원들이 몸으로 시범을 보이는 실천참여교육 방법을 일관하고 있었다.

이 가나안농군학교 교육과 새마을교육의 관계를 지어보면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해 온 김 용기 장로님의 가나안농군학교 교육효과가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적으로 좋은 반응을 일으키면서 뜻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이제는 이렇게 살 때라는 각성의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교육의 효과는 그곳을 다녀온 수료생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확고한 자기정립을 하는가 하면. 생활에 근본적인 태도변화를 가져오고, 가족과 주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을 자청하여 봉사정신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했었던가?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육내용이 높은 이론이나 새로운 사상을 전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김 용기 장로님이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평범한 생각을 바탕으로, 당신 스스로가 멸치 한 마리 먹지 않으면서. ‘소가 소고기 먹고 살이 찌는가?’라고 생명의 동일성과 고귀함을 역설하였다. 양치질할 때 치약은 1m/m만 사용해도 입안에 거품이 넘쳐난다는 등의 실생활에서 필요 없는 낭비를 없애는 근검절약정신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생활화하는 실천신앙을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 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진리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우리 곁에, 우리의 생활 속에 있음을 시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실천력을 부여해 왔던 것이다.

 

2) 농협중앙회 산하 농협대학 김 준 교수

 

이즈음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하여 새마을지도자 양성의 시급성을 절감하였으나, 가나안농군학교의 한정된 인원과 시설로는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관계 장관을 가나안농군학교에 보내 교육내용과 방법을 알아보고, 국가적으로 시행해 볼 방안을 찾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가나안농군학교가 그 역할을 다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자체적인 해결방안이 다각도로 검토된 결과 새로운 정신교육을 시도해 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어느 곳에서? 이 일을 해 낼 것인가?

박 대통령은 관계관들과 의논을 거듭했다. 우선 그 일을 해나갈 사람을 찾는데 주안점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실제행적들을 세밀하게 파악하면서 후보자를 골라나가다가, 여기에 가장 적임자로 선택한 사람이 초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장(1972114~ 1984113)으로 봉직한, 당시 농협중앙회 산하 농협대학 교수 김 준(金 準) 박사였다.

 

그는 전라남도 영광 출신이며 대를 이은 기독교 집안으로 큰 농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실제로 보면서 자랐다. 몇 사람의 머슴을 둘 정도의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농촌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예사로 보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리농림학교와 서울농대를 다닐 때부터 농촌계몽 활동에 참여해 왔고, 학업을 마치고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도 대학생들에게 실천적인 농업교육을 시도했으나, 추상적인 이상향(理想鄕)에 사로잡힌 학생들은 물이 있는 논에 들어가거나, 밭에서 땀 흘리며 실습하는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회의를 느끼고 교단을 떠났다.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난 그는, 젊은 청년들과 고아들을 데리고 순창에 있는 감악산 산속에서 산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염소를 기르면서 계입제출(計入制出), 이소성대(以小成大),분도취양(分度就養) 정신을 실천하는 생활교육을 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그 후 농협대학에 들어와 농촌농민을 위하여 앞장서서 일할 농협의 일선요원을 양성하는 일에 몸담고 있었다.

 

여러 방면의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교육을 담당할 후보자로 선임된 김 준 교수는 평생 소망하던 농민교육을 국가의 지원 아래 할 수 있게 되겠다는 데는 반가운 일이었으나, 예상되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하여 교육을 담당할 교육요원을 확보해야 했고, 교과편성과 운영에 있어 본인의 재량권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아들, , 며느리, 사위 등 혈연(血緣)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어 있으며, 교과편성과 운영이 김 용기 장로 한사람의 구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그와 같은 교육효과를 내고 있는 원동력임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김준 교수는 불특정 자연인들로 가나안농군학교와 같은 인적구성을 하기는 어렵지만, 인사재량권만 주어진다면 어느 정도의 기대치에 가까운 교육요원을 구성할 자신이 있었으며, 교과편성과 운영에 대한 복안도 충분히 구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획당국에 요구한 조건은 교육요원을 선임하는 인사재량권을 허용하고, 교과편성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두 가지 부탁이었다.

 

김준 교수가 제시한 조건은 그 당시로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때는 대통령이 관심을 갖는 사업이면 각 부처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였고, 그 관심과 간섭을 헤아리다가는 본연의 목적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향상실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 교육요원들이 일체감을 갖지 못하는 경우 교육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 교수는 불특정 자연인들로 가나안농군학교와 같은 인적구성을 하기는 어렵지만, 인사재량권만 주어진다면 어느 정도의 기대치에 가까운 교육요원을 구성할 자신이 있었으며, 교과편성과 운영에 대한 복안도 충분히 구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획당국에 요구한 조건은 교육요원을 선임하는 인사재량권을 허용하고, 교과편성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두 가지 부탁이었다.


새마을교육 실시배경과 의의 丁 甲 鎭

 

사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유휴노동을 활용하여 농민들의 생활환경을 자력으로 개선해보자는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전국의 35,000여 마을 중 16,000여개의 마을이 좋은 평가를 받아 정부로부터 추가지원을 받게 되었다. 잘되는 마을에는 앞장서는 우수한 지도자가 있고 주민들의 단합심이 뛰어나다는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했다. 새마을교육의 실시배경과 의의에 대해서는 이 교육의 초기부터 관여해 온 박진환교수의 논문들에 잘 기록되어 있다.

박 정희 대통령은 농림부로 하여금 농촌개발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농촌지도자의 정신교육을 담당할 연수원을 설립하되, 수도원의 생활이나 참선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도록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침내 새마을운동을 시작한지 9개월이 지난 1972. 1. 14일 독농가연수원이 농협대학 구내에서 개원되었다. 1기생은 전국 시군에서 선발된 독농가 140명으로서 2주간의 연수과정이었다. 원장을 비롯한 교직원은 농협에서 파견되었다. 독농가연수원은 농림부와 농협이 주관하는 만큼 영농기술교육과 정신교육이 병행되었다. 정신교육은 강의보다도 인간상록수들의 성공사례발표와 분임토의를 통한 상호교육방법이 매우효과가 컸으며, 독농가들이지만 오히려 정신교육에 대한 교육욕구가 높게 나타났다. 정신교육은 독농가들로 하여금 자기농장의 영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농촌건설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결의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새마을지도자교육이 실시되면서 정신교육의 관료화를 막기 위해 청와대가 직접교육에 관여하게 되고 교육내용도 영농기술교육이 줄어드는 한편 새마을사업에 필요한 과목들이 보강되었다. 또한 여성지도자들도 새마을교육을 받게 되었다. 1973년 수원농민회관으로 연수시설을 옮기게 되며 7. 2일부터 독농가연수원은 새마을운동의 산실 화를 위해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개칭된다. 농민훈련소로 시작되어 국민정신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하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새마을교육은 매우 감동적이며 실용적인 교육으로 평가되었다. 역경을 무릅쓰고 우뚝 선 눈물겨운 성공사례 청취와 규율 있는 합숙생활, 교직원들의 헌신적인 지도노력과 함께 저명한 강사진들의 호소력 있는 강의는 새로운 각오와 뜨거운 사명감을 심어주었다. 새마을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한 분임토의는 진지하면서도 유익한 정보공유의 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반성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새마을교육은 정신교육의 중요한 모형이 되었으며 교육을 이수한 새마을지도자들은 공무원들에게도 실시되기를 희망하였다. 중앙부서의 국장급들이 사회지도자반으로 편성되어 농촌지도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전국의 지방공무원교육원에서 일제히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새마을교육이 실시되었다. 장차관들과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등 사회지도층인사들도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교육을 받는 사회적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새마을지도자들은 연수원에 입교하고 싶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상황이었고 사회지도층도 좋다고 하니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재벌총수들을 비롯한 기업인들이 새마을교육의 효과를 체험하고 생산성향상과 노사화합의 일환으로 공장새마을운동과 직장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자수성가를 이룩한 기업가들은 자조 자립의 길로 가는 농민의 입장이 기업가인 자신들의 그것과 상통되는 점이 많았기에 감명이 깊었다. 기업체가 새마을교육을 실시하며 얻게 된 경험적인 사실은 애국애족의 국가관확립을 기반으로 할 때 종업원들이 애사심을 더욱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일에는 앞장서야 한다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새마을교육은 올바른 사회와 직장, 부강한나라를 건설하기위한 생활윤리를 정립하기위해 새마을정신을 생활화 하자는 것이다. 한때 새마을교육기관이 85개에 달한 적도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새마을교육실적은 합숙교육 678천명, 비합숙 교육 연인원이 6,953만 명에 달한다. 합숙교육 중 새마을지도자는 133천명으로서 20%에 불과하다. 이는 새마을교육이 명실상부한 국민정신교육이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부원장


1) 독농가(篤農家) 교육

 

교육은 종류와 형태가 많다. 각급 제도교육을 비롯하여 직무교육, 정치교육, 종교교육, 사회교육 등 경우에 따라서 많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새마을교육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교육방식 이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김 준 원장의 구상으로 시작된 새마을교육은 교과편성이나 진행과정이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이었다.


김준 원장이 시작한 독농가교육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10~12시 취침시간까지 식사시간과 매시간 주어지는 10분간의 휴식시간 외에는 잠시도 시간낭비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루함이나 피곤함을 느낄 수 있는 부담도 주지 않은 채 2주일간의 연수생활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1972224, 박 대통령도 얼마나 관심이 깊었던지 독농가교육 2기 때는 농협대학 교육현장을 직접 찾아와 교육시설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살펴보고, 강의실 뒤쪽 책상을 높여 강사와 시선이 닿을 수 있도록 보완해 줄 것과 침실 연탄난로에서 연탄가스가 새지 않도록 주의해 줄 것까지 당부하면서 연수생들이 남긴 수료소감을 한 장 한 장 읽어가며 교육효과를 조심스럽게 점검했다.


김준 원장이 교육요원 확보가 가능했던 것은, 당신 스스로가 문제해결을 위한 헌신적인 인재양성의 꿈을 버려본 적이 없었고, 실제로 그러한 생활을 일관해 왔기 때문에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인원구성을 할 때는 그 동안 뜻을 같이 해온 동지들과, 적극적으로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직접 교육을 담당할 교관(상당기간까지 교수는 교관으로 호칭했음)단과 교육 지원을 담당할 관리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수원의 교육요원들은 농협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파견 받았고, 처음 시작한 독농가연수원이나 그 다음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라는 기관도 1026사태 이듬해 특수법인이 설립될 때까지 농협중앙회의 한 기구로 교육요원들의 인건비를 농협중앙회가 부담했고 인원교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1) 교육요원 선발

 

초기 독농가교육과 새마을지도자교육을 고양 원당에 있는 농협대학에서 할 때는 총 수용인원이 140명이었으므로 김 원장 주변인사로 교육요원 구성이 가능했지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수원 화서동에 있는 농민회관으로 이전하고 수용인원이 360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교육요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준 원장에게는 더 많은 인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어떻게 선발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생겼다.


그는 농협 내에서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봉사정신이 남다르고, 대 농민자세가 헌신적인 중견 책임자급을 후보에 올리고, 그의 생활실태를 가능한 방법으로 점검한 다음, 김 원장이 직접 면담을 했다. 우선 연수원 교육요원으로서의 생활을 설명하고, 본인의 의사와 가정형편을 청취한 다음, 할애요청을 하고 전입발령을 했다.

다른 한 방법은 새마을연수원에 연수를 받으러 온 농협 중견간부들 중에서 연수생활 자세와 그 동안 일 해온 과정을 알아보고, 전과 같이 원장이 직접 면담절차를 거쳐 선발하기도 했었다.


교관(교수)요원은 인사발령을 받고 부임을 하면 연수복으로 갈아입고, 교관(교수)회의 시간에 한 사람 한사람 본인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을 소개했다.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동안의 이야기, 힘겨웠던 이야기, 보람을 느꼈던 이야기, 가족들의 배경과 인격형성 과정까지 소상하게 자기의 전부를 털어놓는다. 한 사람이 며칠을 두고 자기소개를 하는 수도 있었다.


발표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이 시간을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이 방법은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데 아주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하여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같은 일을 해나가는 데 깊은 동지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지만, ‘뜻은 피보다 더 진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서로가 진정한 동지의식을 갖고 있을 때 일의 협조나 능률은 배가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하나의 구성원이 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연수원에서 일을 하면서 생각과 다른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마음에 맞지 않거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최소한 2년은 근무하자는 사전약속은 하지만) 3개월 만에 또는 일 년 이내에 농협으로 원대 복귀하는 사례도 있었다.

 

연수원에서 교육요원으로서의 생활은 한 치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수원에 있는 사람은 반복되는 같은 일이지만, 연수원에 오시는 분들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과정이므로 교육요원의 입장에서의 형편이 고려될 수 없는 것이었다.

2) 교육요원의 자질향상과 일체감 유지

 

열의 전도는 발열체의 열량에 정비례한다.’는 이 물리적인 법칙을 김 준 원장은 교육의 절대 신조로 삼았다. 약한 불기의 난로가 방안의 온도를 높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선 교육요원들의 정열이 8090도로 불타고 있을 때, 연수원에 오시는 분들이 6070도라도 올라가지, 교육요원들이 3040도로 냉랭한 상태에서 오시는 분들이 8090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이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틈만 나면 강조했다.


김준 원장은 확실히 100도에 가깝게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와 같이 밤낮을 함께 하는 연수원 교직원들은 불타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타지 않으면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 곳도 빈 곳이 없을 정도로 불을 지르고 다녔다.


개인별 지도방법으로는 교육요원이 처음 부임해 왔을 때 개별면담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원장의 교육관과 정신적인 기조를 갖고 있는 대로 다 전달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업무추진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언제든지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 교육요원은 항상 긴장된 가운데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긴장된 생활을 했는가 하면, 강의시간 종료 신호를 알리는 담당자는 책상에 앉아 잠깐 졸다가 깜짝 놀라, 시계도 보지 않고 종을 울리는 바람에 강의도중에 끝나는 종이 울려 버렸는가 하면, 물을 많이 마시는 강사가 물을 더 청하는 소리를 듣고 소화기를 들고 강의실로 뛰어 들어간 해프닝도 있었다.

 

매월 봉급(농협 직급 호봉에 따라)타고, 박 대통령이 주는 하사금(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도 받고,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힘들다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어 농협으로 복귀하거나, 버티는 데까지 버텨 보기도 했다.

 

19747월에는 박 대통령이 연수원에 오셨다가 사나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으로 이런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집에서 아이들과 실랑이하고 있는 부인들은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살면 그래도 외로움은 덜할 것 아닌가? 같이 모여 사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는 특별지시에 의하여 수원 서둔동에 13~24평짜리 연수원 교수아파트 23세대를 건축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모여 살았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가 귀할 때라 아파트를 지어 다 같이 모여 놓으니까 한결 마음도 놓이게 되고, 아이들도 서로 돌보면서 재미있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생필품을 공동구매하거나, 부인들의 여가선용을 위하여 서예 강사를 초빙 서예공부를 한다거나, 연수원에서 해야 할 통신교재(수료생들에게 보내는 계간지) 발송업무를 대신해 주고, 모든 가족이 참여하는 행사(어린이 날, 크리스마스 등)를 공동으로 하는 등 재미있게 지날 수 있었다. 이때 가족들 간에 맺어진 정들은 연수원을 떠났지만 몇 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웃지 못 할 일화는, 교수아파트가 연수원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자기담당 연수생이 견학을 가고나면 안내담당을 하지 않았을 때는 잠시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빨래가방을 집에 가서 바꾸어 오기도 했는데, 젊은 교수들은 이 틈을 이용하여 부인과의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런데 서너 살짜리 아들이 기회를 주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놓지 않는다. 어느 한 선생님이 궁리를 한 것이 아이에게 호루라기를 하나 사주고 용돈을 주면서 가계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는 호루라기를 신나게 불면서 가계에 간다. 두 내외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소원을 풀기도 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적중하여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는 아이들이 늘었고, 누구네 집 아이가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면 저 집에 아빠가 왔나보다하는 것이 그 아파트촌의 은어(隱語)가 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교수들 중 일부는 아파트에 입주하여 살고 있었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교수들도 있었다. 교육이 없을 때는 당직인원만 남기고 모두 집에 다녀왔다. 집에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교수회의를 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특히 원장은 교수들의 집안안부가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에 나이가 많은 어떤 교수는 집에 가서 너무 피곤하여 잠에 떨어지다 보니 부인이 발가락으로 꼬집어도 모르는 척하고 잠만 자고 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가장이 가정을 비우다보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이 잘 해주었고, 아이들도 다들 잘 자랐다. 교수들이 가정을 유지하고 연수원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내조(內助)의 공이 적지 않았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교수부인들은 빠짐없이 연수원에 입교하여 새마을부녀지도자들과 함께 연수생활을 체험했다. 연수생활을 체험하고 나면 남편에 대한 이해가 더욱 넓어졌다. 화제의 폭도 넓어지고 요일마다 시간마다 이 시간이면 남편이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수원 교수 중에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부인도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규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때도 있었는데. 부인이 연수생활을 마친 다음, 교육을 마친 교수가 집에 갔더니 부인이 좋은 음식상에 술까지 한잔 따라놓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집에 도착하자 부인은 아이들을 다 내보낸 후 큰절을 하면서 당신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진작 몰랐었다고 사과를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더라고 했다.

새마을교육은 교수자신들의 가정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뜻은 있어도 육신이 뒤따르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자 새로운 대책이 강구되었다.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으로서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心身으로)에는 본인의 신청에 의하여 교과진행에 지장 없는 인원 범위에서 한 달 동안의 안식월(安息月)을 갖기로 했다. 안식기간에는 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집을 떠나 산사(山寺)나 낙도(落島) 등 한적한 곳에서 몸과 마음의 휴식을 함께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연수원생활은 몸만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때때로 마음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박 대통령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관인원을 배로 늘려서 3일씩 교대로, 한 팀은 쉬고 다른 팀이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김 준 원장은 끝내 그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인원이 많아지면 팀의 일체감 유지에 어려움이 있고, 정신적인 원력(願力)을 하나로 도출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육 중에 사람이 바뀌는 것은 연수중인 분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힘이 들었지만 원장의 생각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었다(Task force).

 

대학의 총학장들이, 차관들이, 원로 종교지도자들이 무엇을 보고 심성(心性)의 변화를 가져 올 것이며, 무엇을 보고 감동을 받을 것인가? 그분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 즉 교육요원들의 빈틈없이 계속되는 몸 공, 새마을지도자들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애국심, 그런 것들이 적으나마 감동의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질량불변(質量不變)의 법칙은 어김없이 여기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교육요원들도 인간이었다. 공사 간에 걱정거리도 있었고, 순간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눈에 보이거나 내색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무거운 짐 덩어리가 자리하고 있을 때는 그 기()에 담당했던 연수생들의 수료소감문을 통하여 영락없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연수원 교수생활은 하면 할수록 힘들었고 두려웠다. 담당할 연수생명단을 받고나면,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혼자서 기도를 한다. 마음을 다지면서 자기격려를 했다. 내가 공들이는 만큼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매기별 교육이 끝날 때마다 확인하게 됨으로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연수원생활이 힘만 드는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가는 추수지도출장에서 불타는 새마을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충전(充塡) 하면서 일하는 보람을 느꼈고, 원내생활에서 연수생 한사람 한 사람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을 들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가다듬고, 자체연수 때 원로 저명인사들의 질 높은 인생 훈()을 들으면서 자기수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하여 얻는 것이 더 많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시로 그 생활들에 공감을 더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얻은 정신적인 자산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나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교훈은 아무 데서나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보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새마을연수원 교육요원|작성자 우보(http://blog.naver.com/u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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