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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상징계 실재계 상상계

자크 라캉(Jaques Lacan)의 이론적 근간은 욕망이론이다. 라캉은 욕망(desire)과 욕구(need),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구는 순수한 육체적 생존을 위해 충족되어야 할 생물학적 필요성으로 생물학적 본능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구의 차원을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요구의 차원으로 받아들인다. 요구라는 것은 타자가 개입되면서 욕망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욕망은 인간의 개인적인 신체나 감정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데 이 욕망은 결핍에 의해 생성되므로 욕망은 근원적인 결핍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결론적으로 욕망의 본질적인 요점은 주체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는 데 있다. 즉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 타자의 욕망의 미끼로서 제공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또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욕망은 빈 공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는 부모이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욕망은 부모의 욕망 속에서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욕망하는지, 아이에게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바로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욕망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완벽한 충족은 이루어질 수 없다. 사실상 영원히 채워질 수 없다. 욕망의 타자성은 달리 말하면 요구와 욕구의 불일치로 인해 생기는 결여의 체험에서 생겨난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타자의 질문에 주체는 결국 대답할 수 없고 히스테리적 질문으로 되묻는다.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말하는 그것이 되는 것일까?’ 이런 과정은 대상의 간극을 열어놓는다. 환상은 이때 작용한다. 타자의 욕망의 공백을 채우는 상상적인 시나리오가 바로 환상인데, ‘타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써 기능한다. 타자의 타자, 즉 대타자는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회피하게 해주며 이 세계의 맹목성, 우연성에 대해 눈감게 해준다. 만약, 타자 속의 공백, 결여가 부재한다면 타자는 완전한 폐쇄적 체계를 이룰 것이며 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소외될 것이다. 주체가 소외를 피할 수 있고 동일시를 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타자 내의 결여 때문이다. 주체는 타자의 결여와 자신의 결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상은 주체를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하는 심리적 외상, 실재, 타자의 주이상스(jouissance), 가늠할 수 없는 욕망 등을 받아들일 만한 것을 변화시키려는 방어수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환상이라는 공간은 에로티시즘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라캉의 욕망이론 안에서 에로티시즘이란 욕망과 교차되는 과정에서 욕망이 넘쳐 밖으로 나오는 결과적인 에너지이다. 넘쳐 나온 욕망은 개인의 환상이라는 필터를 거쳐 상징계 밖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주이상스의 체험으로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원으로서 에로티시즘을 발화한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욕망이론의 핵심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 알아보자.

상상계의 기초는 거울 단계에서 자아가 거울에 비친 영상이나 또는 유사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동일시는 상상계의 중요한 특징이 되고, 상상계는 동일시의 모형이 된다. 상상계는 인간 주체성과 동물행동학이 만나는 근접한 지점을 나타내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상상계는 상징계에 의해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동물과 인간이 상상계를 공유하고 있지만, 인간 존재에게 상상계는 동물에게 그러하듯 자연적인 상상계가 아닌 상징계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동물에게 없는 언어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의 습득으로 특징된다. 이 상징계는 ‘기표의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 문화의 영역인 상징계에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동일시가 깨어지고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시를 깨는 근원적인 타자성의 영역, 즉 상징계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법과 금지의 명령이며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의 욕망을 거세시킨다. 이것은 은유와 치환의 이미지로 기표화 되어 나타나는데 이 과정에서 ‘대상 a’가 부상한다.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자 상징계의 욕망구조를 파괴하는 실재이며 주이상스의 영역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킨 ‘대상 a’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험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과 불쾌이며 극단적인 경우 죽음충동으로 이어진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무엇으로 정의된다.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의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지 않은 잉여다. 언어와 기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상징계의 그물망이 포착하지 못하는 언어 이외의 것, 불가능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구멍이며, 구멍이 판타지로 치장했을 때 욕망의 미끼, 즉 대상 a가 된다고 한다. 아울러 실재계는 쾌락의 원칙너머에 있는 반복적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다. 실재는 상상과 상징계를 연결하는 제 3의 고리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공백이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순환과 반복을 가능케 한다. 판타지의 주체를 만들고 주체의 얼룩이자 타자로 작용한다.

좀 더 깊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알아보자.


1. 상상계

 

상상계는 ‘반사에고’에 대한 유아의 경험에서부터 성장해간다. 이것은 거울 단계로부터 생겨나지만, 다른 사람들과 외부세계에 대한 성인 개체의 경험에까지 널리 확장해 나간다. 허위 동일시가 발견되는 곳이면 - 주체 내에서건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건 또는 주체와 사물 사이에서건 - 거기에서는 상상계가 지배력을 장악한다. 이것은 옷의 일종으로, 갑옷이라는 첫 번째 껍질로 생각될 수도 있다. 상상계는 오인의 기능을 행사하며, 이것은 지식과 구별되기 마련이다.

상상계에 대한 라캉의 개념은 1936년 논문 <거울단계>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 논문이 언급하는 주요 논점은 프로이트의 1914년 글 <나르시시즘에 대해 -입문>이다. 이 나르시수스 신화는 어떤 명백한 상호성이라는 것이 이미지가 그 자체로 회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순간을 특히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거울 단계 개념은 이미지, 정체성 그리고 자기 동일시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끔 해준다. 거울 단계의 주요성격 중 하나는 아이가 양육을 위한 의존 상태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아이에게 되돌려진 거울 이미지는 고정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관계는 파편화된 또는 동격이 아닌 주체와 이것의 총체화된 이미지 사이의 관계이다.

나는 주체가, 동시에 자신을 소외시키는, 그런 후에 잠재적으로는 자신과 대적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 혹은 인식한다는 이 역설을 강조해 두고 싶다. 이것이 나르시시즘과 공격성 간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기초가 된다.(아이는 위험해서 두렵게 느끼는 대상은 멀리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기해 두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공격성, 경쟁심이라고 할, 소외시키는 것으로서의 이미지의 요소이며, 둘째는 주체성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오인이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주체에게는 네 개의 선택적인 나르시시즘적 대상 선택이 있다고 주장한다.

 

a) 자신은 현재 무엇인가.

b) 자신은 과거에 무엇이었는가.

c) 자신은 미래에는 무엇일 것인가.

d) 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그 어떤 이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구별은 이상적 에고(ideal ego) 와 에고 이상형(ego ideal)의 구분이다. 이상적 에고는 보통 유아가 나르시시즘의 모델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되는 나르시시즘적 전능의 이상형이라고 정의된다. 에고 이상형은 나르시시즘(에고의 이상화)과 부모 또는 그 대리인과의 일체화가 동시에 나타남으로서 생기는 인성의 작인이다. 이상적 에고는 ‘자신은 과거에 무엇이었나’에 해당하며, 에고 이상형은 ‘자신은 미래에는 무엇일 것인가’에 해당된다. 이상적 에고는 주체가 동일시하는 투사된 이미지로서, 거울 단계에 관계된 것이고, 에고 이상형은 이차적인 내사(introjection, 무의식적으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현상)가 될 것이다. 라캉에게 이상적 에고는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 형성체로서, 거울 단계에 근원을 두며 상상계에 속한 것이다.

상상계적 동일시와 상징계적 동일시의 관계, 이상적 에고와 에고 이사형의 관계를 고찰해 보자. 상상계적 동일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이미지, ‘자신은 미래에는 무엇일 것인가’를 나타내는 이미지와의 동일시이며, 상징계적 동일시는 우리가 관찰되고 있는 바로 그 장소,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래서 우리 스스로에게 사랑의 호감을 느끼고 사랑할만하다고 느끼는 듯한 바로 그 장소와의 동일시이다.(우리가 다른 사람과 동일시한다는 면에서의 이 특징은 대개 숨겨져 있으며 그래서 반드시 적극적인 성격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한다)

상상계적 동일시는 언제나 큰타자의 특정 응시를 대신하는 동일시이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 주체는 이 역할을 수행하는가? 내가 나 지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나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하게 내가 관찰되는 지점 사이의 틈새는 히스테리를 파악하는데 긴요하다. 히스테리적 신경증 환자는 타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 어떤 사람으로 자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우리가 관찰되고 있는 지점 간의 차이가 상상계적 동일시와 상징계적 동일시의 차이이다.

 

상상계의 기초는 어린아이의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거울 단계’와 관련이 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으로 오인하며 총체적인 형상이자 완전한 이상형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거울단계를 완전한 동일시로 파악할 수 있다. 동일시는 주체가 이미지로 나타났을 때 그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뜻한다. 동일시하는 이미지의 형태는 이상적 자아로 불리는데 이후 상징계에서의 이차적 동일시의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거울단계에서 인간은 어머니라는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게 된다.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사실상 오인이며, 오인은 인간 스스로의 근원적 소외를 낳는다. 이 근원적 소외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질투와 공격성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거울상을 통한 이상적 자아와 자아간의 차이는 좁힐 수 없으며 아이가 성장해도 그 간격은 남게 된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없다면 그 대상을 파괴해서 자신만이 이상형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거울단계의 근본적 속성이다. 이것을 라캉은 근원적인 공격성이라고 말했다.

거울단계에서의 거울상은 자아의 구조이자 대상이 된다. 따라서 완벽한 게슈탈트적 이미지는 자아에게 나르시시즘을 낳고 공격성을 나타낸다. 공격성은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유사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 타자는 주체에 대해 경쟁자로 인식되고 공격을 받게 된다. 공격성과 경쟁이 상상적 관계의 틀에 속한다는 것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의 세계인 상상계는 이미지와 상상, 기만과 현혹물의 영역이다. 상징계에 의한 상상계의 구조화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게 있어서 상상적 관계란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일탈되었음을 나타낸다. 거울단계가 끝나면서 즉, 이상적 자아와의 동일시가 이뤄진 후에 인간은 거울 속의 나를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변증법을 개시한다. 이것이 상징계의 시작이다.

 

2. 상징계

 

1950년대 초 라캉은 매혹시키는 이미지에서 언어 즉 상징계로 그 강조점을 이동시켰다.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야콥슨의 작업에서 끌어온 라캉은, 상상계가 기표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언어가 정체성 구성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일상적으로 하는 다음의 말이 지닐 수 있을 효과를 생각해 보라. “너, 어쩜 네 아버지와 똑같니!” 라캉은 의미란 반작용적으로 형성되어지며, 듣는 사람이 곧 해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듣는 사람이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아이가 어떤 것이 필요하면, 아이의 요청이 해석되어야 한다. 아이의 요구는 언어를 통해 항상 굴절되는 것이다.

라캉 작업의 이 단계에서 상징계는 개념들의 혼합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어떤 구조적의적, 인류학적 견해들이 있으며, 인정에 대한 중요한 헤겔적 사고도 있다. 욕망은 인정을 위한 욕망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나의 주인이오.”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이다. “당신은 내 아내요” 는 “나는 당신의 남편이다”라는 뜻이다. 주체와 타자의 이같은 관계는 인정의 변증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 모두는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때때로 우리는 인정의 말이 주어지는 것을 듣는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엄마예요”, 또는 “넌 속이 깊은 딸이었지”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정이 거부되었을 때에는 고통스러운 외침을 듣기도 한다. “그 사람, 근사하다고 말할만한 것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단 말야?”

대략 1957-58년경, 상징계에 대한 라캉의 개념에 변화가 있었다. 상징계는 자율적인 구조가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주체에게는 의미화 사슬이 없다는, 주체는 ‘폐기된다’는 뜻이다. 주체의 인정이 아닌, 인정의 결여, 존재의 부족이 있다. ‘존재의 결여’가 있다는 것이다. 헤겔적인 인정 변증법의 영역에서 재현(언어) 영역으로의 이같은 이동은 실은 새로운 담론, 즉 구조주의의 결과이다. 구조주의적 사고에서는 인간 주체를 위한 공간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 구호 중 하나는 “주체는 죽었다”이다.

 

상징계는 아이가 언어를 배우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 진입했을 때 만난다. 언어와의 만남은 아이가 기표들의 세계 속으로 밀려나며 근본적인 타자성을 경험함을 뜻한다. 자연의 상상계와 반대되는 문화의 영역인 상징계에선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동일시가 깨어지고 아버지가 개입한다. 어머니-아이의 총체성, 완전한 동일시는 단절되고 주체성을 나타내는 이름, 즉 기표를 갖게 된다. 이 기표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하는 절대적 쾌락, 주이상스를 금지시킨다. 주이상스는 희열, 향락, 환락 등으로 번역되는데 단순한 쾌락과는 다른 고통 속의 쾌락을 의미한다. 쾌락의 절대성과 극한은 고통이며 육체를 소멸하면서까지 누리는 기쁨이기에 주이상스는 죽음충동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상상적 동일시를 깨는 근원적인 타자성의 영역, 즉 상징계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법과 금지의 명령이며 아이와 어머니의 완전한 동일시,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아이의 욕망을 거세시킨다. 이 거세행위는 향락을 희생하는 행위인데 상징적인 특성을 갖는다. 즉 실제적인 거세가 아니라 향락을 기표의 영역과 교환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표는 끝없는 순환운동 속에서 주체의 욕망의 대상을 끝없이 놓치게 만든다. 이제 아이는 기표 속에서 기표들을 욕망하는 환유적 운동속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표들의 그물망은 상징적 그물망이며 언어의 세계이며 문화의 영역이다. 만약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과 주이상스를 교환하지 않는다면, 즉 상징적 거세를 거부한다면 아이의 주체는 정신병에 빠져든다.

이처럼 주이상스는 죽음충동과 연루되기에 상징계에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주체는 상상계적 쾌락을 거부하고 자신의 쾌락일부를 타자에게 위탁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주이상스, 향유는 육체 외부에 존재하는 리비도이며 타자가 나의 쾌락을 대신 즐긴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대리적 수취의 향유를 라캉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를 본따서 잉여 향유라고 불렀다.

상징계는 대타자를 전제하며 주체는 대타자와 관계하게 된다. 즉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며 사회적 상징적 영역 속에 통합된다. 주체는 위임된 역할을 맡아 상징적 질서 속에 배속된다. 이때 주체는 ‘왜 나는 당신이 나라고 말하는 바라 될까’라는 질문으로 응답한다. 이것을 라캉은 히스테리적인 질문이라고 했는데, 주체를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는 호명과정에 저항하는 주체 속의 대상의 간극을 열어놓는다. 이 분열과 틈새를 메우는 것이 주체의 환상적인 요소인 ‘대상 a’이다. 대타자의 분열과 틈새 사이에 환상이 개입함으로서 주체의 결여와 대타자의 결여 사이를 보충한다. 그럼으로써 상징계는 자연스럽게 통합되고 판타지는 주체의 욕망을 떠받치는 발판으로 작용한다.

대타자의 욕망에 대한 주체의 반응은 환상공식 $◇a 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대상 a’는 대타자내의 기표들의 연쇄의 단절지점의 공백 속에 들어가는 기표체계 바깥의 잉여이며, 욕망의 대상-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 a’는 실제 대상의 부재와 결여, 욕망이 그 둘레를 회전하는 공백을 지칭한다. 앞서 말했듯 욕망이 요구에서 욕구를 뺀 무엇이기에 필요의 만족에 의해 꺼지지 않고 끝없이 지속되는데 역설적이게도 주체가 요구하는 대상을 얻은 그 순간에 여전히 얻지 못한 무엇으로서 대상 a는 출현하게 된다. 결국 ‘대상 a’는 상징계의 대타자가 둘러싼 공백이자 현실에서 적출된 잉여, 알 수 없는 물(thing)이다.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지만, 상징계의 욕망구조를 파괴하는 실재이며 주이상스는 영역, 다시 말해 쾌락원칙을 넘어선 불쾌 속의 쾌, 고통 속의 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욕망을 불러일으킨 ‘대상 a’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험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과 불쾌이며, 극단적인 경우 주이상스가 함축하는 죽음을 만난다.

 

3. 실재계

 

실재계가 상징화에 저항하고 있다는 주장을 라캉이 발전시킨 것은 약 1956-56년이었다. 실재계는 ‘상징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성에 대한 분석적 견해는 알렉산드르 크와레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라캉에게 있어 실재계는 언제나 불가능성과 관계하고 있다.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실재계는 배제된 것이며 담지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실재계에 대한 라캉의 주장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모든 주장과는, 즉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실재계는 주체 탄생보다 앞선 상징계의 장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광기에 걸린 주체가 자신이 존재해 있지도 않은 실재계를 환각하며,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경우든 실재계는 ‘언제나 -이미-거기에 있기’ 때문에 보기 혹은 듣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실재계에 대한 라캉의 개념은 프로이트의 이드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갑작스러움, 당황스러움, 예기치 못함과 관계가 있다.

정신분석이라는 변증법적 경험은 오직 말을 다룰 뿐이다. 라캉은 자신의 역할을 각각의 꿈과 징후에 의미를 제공하는 해석자로서의 역할로 개념화시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그는 환자들이 사건을 자기들과 연관지울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린다. 대개의 분석가들과 달리 그는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귀를 기울인다. 분석가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타자의 담론, 즉 의도성에 나 있는 틈새를 통해서 미끄러지는 무의식이다.

라캉은 분석의 대상을 정의하기를, 피분석가와 분석가를 상징계의 축으로 던져버리는 제삼자의 개입을 통해, 그 피분석자와 분석가의 모든 상상계적 관계를 깨뜨려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삼자의 개입은 언어(세 개의 기본적인 대명사 ‘나’/‘너’/‘그-그녀-그것’의 사용)의 필수조건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징계가 분석 상황의 ‘상상계’에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이다. 분석가와 피분석자는 모두가 어떻게 자신들이 그와 같은 상호관계를 초월한 질서에 의해 구성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라캉은 주체와 분석과정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자신들을 눈멀게 하는 이 상상계적 이자 관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라캉에서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무엇으로 정의된다. 실재계는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의 사회적-상징적 네트워크 속에 포함되지 않은 잉여이다. 따라서 이런 실재가 상징계에 침입해 올 경우 외상적 성질을 갖는다.

실재계는 외상적 귀환의 형태로 분출하면서 일상생활을 뒤흔들어 놓지만 균형을 잡아주기도 하는 양가적 성격을 지닌다. 실재는 현실의 우연성 속에서 일관성을 보증함으로써 상징계의 안정에도 기여하고 있는데 이를 실재의 응답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상징계 대타자의 중재 하에 끝없는 반복에 몰두하고 있다면, 실재계는 그것을 넘어서 우연성과의 조우를 제시한다. 따라서 언어와 기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상징계의 그물망이 포착되지 못하는 언어 외의 것, 불가능한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실재계다. 이 실재계가 없다면 다시 말해, 욕구와 요구의 차액인 욕망의 원인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그런데 실재계는 주체 탄생보다 훨씬 앞선 상징계의 구조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다시 말해, 상징계가 상상계를 구조화하고 상징계 내의 구멍 속에 바로 실재가 자리한다. 상징계는 구멍난 세계이며, 주체는 판타지로 그것을 채우지만 판타지 공식의 대상 a에 다가갈수록 현실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실재계는 상징계 내부의 잉여(대상 a) 로서 내재적인 적대로 기능한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구멍이며, 구멍이 판타지로 치장했을 때 욕망의 미끼, 즉 대상 a가 된다. 아울러, 실재계는 쾌락의 원칙너머에 있는 반복적인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다. 실재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연결하는 제 3의 고리이며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은 공백이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순환과 반복을 가능케 한다. 실재계는 판타지의 주체를 만들고, 주체의 얼룩이자 타자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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