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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현존재와 시간성

1. 세계-내-존재인 현존재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 존재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인 인간에서부터 존재 분석을 시작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거기에 존재하는 현존재임을 드러내고 현존재가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세계 안에 존재함을 밝힌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타인과 더불어 존재하며 세상 사람인 그들에 의해 휘둘려서 자신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실을 분석한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존재 분석을 통해서 인간이 실존성, 현사실성, 빠져 있음이라는 염려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살펴보고 하이데거가 밝혀낸 인간의 존재 구조를 통해서 상호관계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그동안 물어지지 않았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기존에 존재라는 개념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될 수 없다”라고 치부해왔다(Heidegger, 1997, p.17).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를 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하이데거는 먼저 존재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분석하여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Heidegger, 1997, p.22).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자인 인간을 현존재라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이라는 존재 방식을 분석한다. 인간은 “그 존재함에서 바로 이 존재함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고 “그 존재자가 각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존재이다(Heidegger, 1997, p.28). 현존재인 인간은 자기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세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던져져서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임을 인식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 방식인 실존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고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인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현존재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존재론이 비로소 발원할 수 있는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Heidegger, 1997, p.30).”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하는 실존적 존재라 한다(Heidegger, 1997, pp28-29).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Heidegger, 1997, p.67).”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기 삶을 기투할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목적은 세상 사람에게서 근거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근거할 수도 있다. 현존재 분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인간의 현존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존재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을 실존으로 바라보고 실존인 현존재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가치에 빠져서 자신을 잃게 되는지 분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세계-내-존재임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내-존재는 세계 안에서 다른 존재자와 함께 머무르고 활동한다. 세계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하이데거는 “세계는 “공적인” 우리-세계 또는 자신의 “고유한” 가장 가까운 (가정적) 주위세계’를 의미”하고 세계는 “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실존론적 개념을 지칭한다(Heidegger, 1997, p.96).” 세계는 현존재가 살아가는 생활세계이자 존재론적이고 실존론적 의미를 가진 공간이다.

하이데거는 세계성을 도구 존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유의미성으로 확장한다. 세계에서 도구는 어떤 목적성을 가진 채로 존재한다. 도구는 도구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될 때는 의식되지 않는 데 사용상의 문제가 있을 때는 잘 의식된다. 예를 들면, 의자는 앉아있는 목적에서 잘 사용될 때는 잘 인식되지 않다가 의자가 망가져서 불편하게 되면 잘 인식된다. 도구가 지시하는 바가 결여될 때에야 그것이 인식되는 것이다. “지시의 방해 속에서―어디에 사용할 수 없음에서―지시가 명백해진다(Heidegger, 1997, p.109).” 그런 지시 연관의 단절이 도구의 목적을 일깨운다. 그런 도구의 목적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모든 확정과 고찰 이전에 “거기에” 있다(Heidegger, 1997, p.109).”

어떤 존재자는 먼저 출현한 이후에 거기에 도구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관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도구로서의 사물이 세계에 출현하는 것이다. “도구연관이 그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둘러봄에서 항시 애초부터 이미 보아진 전체로서 빛나게 된다. 이러한 전체와 더불어 세계가 자신을 알려온다(Heidegger, 1997, p.109).” 도구 존재는 이미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자로 드러나고 그런 존재자의 의미는 세계라는 전체적인 의미 연관에 속해 있다. 현존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므로 현존재는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존재자의 전체적인 지시 연관을 담고 있는 것이 세계이고 도구는 현존재의 궁극목적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궁극목적에 따라서 세계의 존재자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들끼리 근원적인 전체성으로 서로 얽혀 있으며, 그것들은 이러한 의미부여로서 그것들이 무엇인 바로 그것이다. 이 의미부여 속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에게 선행적으로 자신의 세계-내-존재를 이해할 것으로 내준다(Heidegger, 1997, p.125).” 현존재의 전체 의미체계가 세계 본질인 세계성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부여의 연관의 전체를 (…) 유의미성이라고 칭한다(Heidegger, 1997, p.125).” 유의미성은 현존재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근대적 방식의 의식의 자기반성을 통한 자아의 분석을 거부하고 현존재의 세계 속에서의 사태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자기성과는 대비되는 비자아라는 것을 제시한다. ““비-자아”는 본질적으로 “자아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런 존재자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 자신의 한 특정한 존재양식, 예를 들면 자기상실을 의미한다(Heidegger, 1997, p.163).” 비자아는 진정한 자기를 상실한 것이다. 현존재가 비자아로 살게 되는 것은 현존재가 근본적으로 타인과 함께 살면서 세계 안의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 없는 순전한 주체가 “존재하거나” 주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Heidegger, 1997, p.163).

현존재는 항상 다른 주관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공동존재이다.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이고 세계-내-존재에서 내-존재를 의미하는 “안에-있음은 타인과 더불어 있음[공동존재]이다(Heidegger, 1997, p.165).” 공동존재는 타자에게 영향을 받고 타자에 둘러싸인 관계를 갖는다. 일상적인 세계에서 현존재는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며 자신을 항상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사람들이 타인들과 함께, 타인들을 위해서 또는 거슬러 장악한 그것을 배려함에는 항시 타인과는 다르다는 차이에 대한 염려가 깔려 있”는 것이다(Hedegger, 1997, pp.175-176).

하이데거는 이런 비교의식을 거리감이라 한다. 거리감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규정한다. 대부분의 현존재는 이런 거리감에 빠져있으며 이런 방식의 삶은 타인과의 경쟁, 고립, 이기심을 낳는다. 현존재는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려서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익명의 세상 사람인 그들에 휘둘려서 살게 되며 세상 사람이 현존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 세상 사람이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 자신도 아니며, 몇몇 사람들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총계도 아니다. 그 “누구”는 중성자[불특정 다수]로서 그들[세인]이다(Heidegger, 1997, p.176).” 그런 세상 사람의 기준에 따라 그들의 삶을 사는 것을 평균성이라 한다.

거리감과 평균성이 세속적 기준을 만들어낸다. 현존재는 세계에 의미 부여를 할 때 이런 세론에 기반해서 한다. 익명의 세상 사람은 이미 세계에 관한 판단을 내려놓은 상태다. 그런 판단을 받아들인 현존재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진다. 실제로 세상 사람은 익명이라서 아무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지만 세상 사람의 기준에 빠진 현존재는 책임을 전가한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인 그들은 아무도 아니며, 이 ‘아무도 아닌사람’에게 모든 현존재가 서로 섞여 있음 속에서 그때마다 각기 이미 자기를 내맡겨버린 것이다(Heidegger, 1997, p.178).” 현존재는 세상 사람으로 살면서 세계의 존재자들을 대한다. 이럴 때 세계는 오직 세상 사람의 관점으로 환원된다.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우리가 본래적인 자기, 다시 말해서 고유하게 장악한 자기와 구별하고 있는 그들-자기이다(Heidegger, 1997, p.180).”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그때마다 각기 이미 언제나 기분잡혀 있음”에 처해있다고 본다(Heidegger, 1997, p.187). 현존재는 기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임이 드러난다. “기분잡혀 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기분에 따라서 현존재가 그의 존재에서 그 자신이 실존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그 존재로서 떠맡겨진 그런 존재자로서 열어밝혀져 있다(Heidegger, 1997, p.187).” 특히 불안은 세상 사람의 가치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게 하면서 현존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세상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현존재는 그런 자기 존재를 받아들여서 살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불안을 통해서 현존재가 “그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내던져져 있음이라는 표현은 떠맡음의 현사실성”을 드러낸다(Heidegger, 1997, p.188). 현존재는 거기에 내던져져 있음이며 자기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현사실성에 부닥쳐있다.

현존재는 현사실성을 직면하려 하지 않고 세상 사람으로 도피한다. 현사실성을 직면하고 싶지 않기에 불안이란 기분에서도 도망가고자 한다. 현존재의 현사실성은 이성에 기반한 자기성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기분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존재는 항상 기분에 처해있기에 불안을 다른 기분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기분에도 역시 현사실성은 은폐되어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기분에서 드러나는 현사실성에서 도망가서 “그의 일상성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을 빠져있음[퇴락]이라 한다(Heidegger, 1997, p.245).

현존재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그런 궁극목적에 의해서 유의미성을 갖고 세계를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궁극목적을 기투하며 사는 것을 이해라고 한다. 이해를 통해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유일한 존재자임이 드러난다. 현존재는 궁극목적에 기반해서 세계의 존재자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해는 열어밝힘으로서 언제나 세계-내-존재의 전체 근본구성틀에 관계된다(Heidegger, 1997, p.201).” 현존재는 사물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가능성이 있어야 자신을 어떤 목적에 기투할 수 있다. 현존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을 갖는다. 현존재는 자기 가능성을 세상 사람으로부터 온 가치나 기준으로 채워나갈 수도 있고 고유한 자기만의 목적을 갖고 살아갈 수도 있다.

현존재는 항상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궁극목적을 갖고 자신을 기투한다. 세계 속에서 자신을 펼쳐나가고 자기만의 이상을 따라서 살고자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존재는 세상 사람의 가치에 빠져서 “안정을 누리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모든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로 떠내려가게” 되고 이렇게 “빠져 있는 세계-내-존재는 유혹적-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소외적이다(Heidegger, 1997, p.243).” 자기소외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실존으로 사는 것이 본래적 이해이고 세상 사람에 휘둘려서 사는 것이 비본래적 이해이다.

현존재는 세상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서 의미가 부여된 말에 영향을 받아서 세계를 평균성에 맞춰서 해석한다. 말은 “의미부여 연관의 전체 안에 열어밝혀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보존하고 있으며 (…) 근원적으로 타인의 공동현존재 및 각기 자기 자신의 고유한 안에-있음에 대한 이해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Heidegger, 1997, p.230). 그럴 때 말은 세상 사람의 평균성으로 내려앉고 현존재는 그런 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하이데거는 세상 사람의 기준에 맞춰서 사회적 권위를 같게 된 그런 말을 빈말[잡담]이라 한다. “잡담의 무지반성이 잡담이 공공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한다(Heidegger, 1997, p.232).”

빈말은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빈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현존재는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며 단순한 호기심으로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잡담은 호기심의 방향도 규제한다(Heidegger, 1997, p.237).” 이것은 진정한 존재 관계와는 대조되는 뿌리 내리지 못한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다. 빈말에 빠져 호기심으로 세계를 기웃거리는 현존재는 진정한 자기 존재 가능성에 따라 살지 못하는 애매함에 빠진다. “빠져 있음은 (…) 잡담,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에 의해서 이끌리고 있는 이상, 그 서로 함께 있음에 몰입해있음”이고 이런 빠져 있음[퇴락]은 “현존재의 비본래성이라고 이름했던 그것”이다(Heidegger, 1997, p.240).

퇴락은 자기 존재에 대한 진정한 물음을 하지 않은 채 세상 사람에 빠져서 자신이 정도를 걷고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이다. 세속의 가치가 정답이라는 확신에 빠진 현존재는 퇴락하여 자기를 소외시키고 있다.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본래적 이해가 결여된 채로 비본래적인 존재 양식으로 전락한다.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항상 이런 퇴락에 유혹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한다.

불안은 현존재의 그런 본래성을 드러내는 기분이다. 불안은 두려움과는 달리 세계의 특정 대상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현존재로부터 일어난다. “불안의 ‘그것 앞에서’는 세계-내-존재 그 자체이다(Heidegger, 1997, p.254).” 퇴락한 현존재가 평균성의 무의미함에 직면할 때 불안해진다. ““아무것도 아님과 아무데에도 없음” 속에서 고시되는 전적인 무의미성(Heidegger, 1997, p.255)”으로 세계는 드러나고 “독특한 무규정성이 (…) 표현(Heidegger, 1997, p.257)”된다. 세계는 세상 사람의 해석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규정성을 가지며 일상적 세계가 붕괴될 때 경험되는 섬뜩한 기분으로 세상 사람이 주는 안정감과 안도감을 앗아간다. 세계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은 채 현존재를 압박하고 그런 세계 안에 있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불안은 세계-내-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마주하게 하고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가장 고유하게 만드는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불안은 현존재를 가능존재로서, 그것도 그가 오로지 그 자신에서부터 개별화된 현존재로서 개별화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존재로서 열어밝힌다(Heidegger, 1997, p.256).” 불안을 통해서 현존재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유일한 존재이자 단독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마주하고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궁극목적을 통해 존재자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불안의 ‘그것 앞에서[대상]’는 내던져진 세계-내-존재이다. 불안의 ‘그 때문에[이유]’는 세계-내-존재-가능이다(Heidegger, 1997, p.261).”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염려[마음씀]로 규정하는데 염려는 실존성, 현사실성 그리고 빠져 있음으로 구성된다. 세상 사람의 가치에 은폐된 본래적 현존재로서, “현존재 자신인 그 존재가능에 대한 존재로서” 실존은 “자신을-앞질러-있음”이다(Heidegger, 1997, p.261). 비본래적 삶 이전에 본래적 삶이 존재한다는 의미의 자신을-앞질러-있음이라는 실존성을 갖는 현존재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세계-내-존재라는 현사실성을 갖는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가능에서 비롯하는 섬뜩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세상 사람에 빠져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정리하여 현존재의 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 곁에-있음으로서 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안에-있음”이라 한다(Heidegger, 1997, p.263). 이런 현존재의 전체구조를 염려라 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곧 염려라는 현상학적 존재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현존재는 이미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이다. 현존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동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특정 공간에 내던져있음으로써 세계와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 구조를 가진 것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인간은 외부와 분절된 자아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존재 구조로부터 이미 상호관계적이다.

현존재는 비본래적 삶의 방식으로 세상 사람인 그들에 빠져 사는 유혹을 받는다.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가 스스로 만들기 이전에 기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살고 있다. 인간은 외부와는 단절되어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으로부터 세계를 판단하고 거기서부터 삶의 가치나 기준을 찾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어진 세상에서 세상 사람의 가치나 기준을 비판 없이 가져다 쓰고 있다. 현존재는 내던져진 거기에서 세계나 타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2. 시간성과 역사성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염려라는 존재 구조를 시간성을 통해서 심화해나간다. 시간성의 분석은 현존재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한다. 죽음으로 먼저 가보는 도래를 통해서 현존재는 본래적 삶을 살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미리 앞서가는 도래와 이미 존재한 본래적 가능성의 기재를 접수하여 통일된 의미로서의 삶을 순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본래적 시간성이다. 비본래적 시간성은 통속적 시간이자 공적인 시간인 세계시간에서 지금의 연속으로만 사는 것이고 그런 무한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끝을 망각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통해서 역사성으로 나아간다.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이자 공동존재로서 세계의 유산을 상속하고 반복하여 본래적 가능성으로 사는 존재임을 밝힌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살펴보고 시간성과 역사성에 어떠한 상호관계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고 현존재에게 죽음이 중요한 문제임을 분석한다. 현존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현존재는 타인의 죽음에서 어떠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죽음이 오직 그 현존재에게만 일어나는 단독적인 일임을 알게 된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다(Heidegger, 1997, p.322).” “모든 현존재는 각기 죽음을 그때마다 스스로 자기 위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Heidegger, 1997, p.322).” 이와 같이 죽음은 대리할 수 없다는 각자성을 갖는다.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완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죽음의 가능성은 아직-아님인 것으로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이미 자신의 아직-아님으로 있다(Heidegger, 1997, p.328).” 현존재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이고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Heidegger, 1997, p.329). 현존재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염려를 통해 죽음을 분석한다. “죽음이 탁월한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또는 종말을 향한 존재)은 이 성격들에서부터 규정되어야” 하고 “죽음의 현상에서 어떻게 실존, 현사실성 및 빠져있음이 밝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Heidegger, 1997, p.335). 죽음은 아직-아님이지만 동시에 앞에 닥침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필연적 존재 가능성이고 현존재는 그런 필연적 존재 가능성 앞에 닥쳐있다. 그런 죽음의 가능성에서 세상 사람인 그들과의 연관이 끊어지면서 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가능성”으로 남게 된다(Heidegger, 1997, p.336).

필연적으로 다가올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현존재는 죽음에서 도피하는 비본래적 태도와 죽음을 임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본래적 태도 중 하나를 취하게 된다. 죽음은 각 현존재에게 가장 독자적인 가능성으로 드러나고 현존재는 죽음 앞에서 단독자화된다. 죽음은 규정되어 있지 않고 피할 수 없고 능가 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기에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한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현존재는 존재자 중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실존적 존재이기에 죽음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직면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기분을 통해서이다. “불안은 개인의 자의적이고 우연한 “나약한” 기분이 아니라, 현존재의 근본적 처해 있음이며, 현존재가 내던져져 있는 존재로서 그의 종말을 향해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열어밝혀져 있음이다(Heidegger, 1997, p.336).” 죽음은 세상의 기준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독자적인 자신의 존재를 책임지도록 부추긴다. 죽음은 현존재의 실존적 가능성을 일깨우게 한다.

현존재는 죽음을 직면하기보다는 도피하는 퇴락[빠져 있음]을 선택한다. “현존재가 우선 대개 죽음을 향한 가장 고유한 존재를―이 죽음 앞에서 도망가는 식으로―은폐한다(Heidegger, 1997, p.337).” 세상 사람은 죽음에 대해 언급하더라도 자신에게 닥친 것으로 간주하진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죽음’’은 하나의 [다반사적]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Heidegger, 1997, p.339).” 그들은 죽음을 나에게 닥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죽음을 은폐하는 태도는 죽음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하게 한다.

죽음은 항상 현존재에게 미완이지만 확실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죽음의 가능성은 현존재를 앞질러있고 현존재는 자신을 앞지르고 있는 죽음의 가능성에 영향을 받아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자기 자신을 기획투사함”을 선택한다(Heidegger, 1997, p.351). 죽음의 가능성이 충족되는 순간 현존재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의 가능성으로 산다는 것은 현존재가 죽음이 자신에게 임박한 것임을 받아들인 채 산다는 것이다. 죽음에 “미리 달려가봄은 가장 고유한 극단적인 존재가능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낳는다(Heidegger, 1997, p.351). 죽음으로의 선구로써 살 때 현존재는 세속적 일상에 빠져 사는 비본래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인 본래성으로 살 수 있다.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실존성, 현사실성, 빠져 있음이라는 염려는 이렇게 죽음에서도 드러나 있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사실성 앞에서 대부분의 현존재는 세상 사람의 방식으로 빠져 있음으로 죽음의 가능성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런 죽음의 가능성으로 미리 달려가 본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확실한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실현할 용기를 내게 된다. 이것이 곧 실존성이다. 실존성과 현사실성과 빠져 있음은 서로 밀접한 관계로 얽혀 있다.

현존재가 세상 사람에 파묻혀 살 때 잊고 있던 본래적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이 양심이다. 양심에 의해서 현존재는 “그 자기가 그 자신에게로, 다시 말해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로 불러세워지”게 된다(Heidegger, 1997, p.365). 하이데거의 양심은 기존의 도덕적 의식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현존재를 세상 사람의 빈말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양심의 침묵을 통해서 본래적 가능성을 직면하게끔 하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은 나에게서 와서 나 위로 덮쳐온다(Heidegger, 1997, p.368).” “부르는 자는 내던져져 있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능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는 현존재”이고 “부름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로 불러세워진 바로 그 현존재이다(Heidegger, 1997, p.371).” 양심은 본래적 가능성을 인식하는 현존재가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써 염려의 부름이다.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여 자신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기투하고자 선택하는 것이 책임이다. 현존재는 양심의 “부름을 이해하면서 가장 고유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선택된 존재가능에서부터 자신 안에서 행위하도록” 하고 “현존재는 오직 그렇게 해서만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Heidegger, 1997, p.385).” 양심은 현존재의 책임을 일깨운다. 양심에 따르는 현존재는 세상 사람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오는 섬뜩한 불안을 받아들이는 용기로 살게 된다. “침묵하고 있으면서 불안의 태세 속에 가장 고유한 탓이 있음에로 자기 자신을 기획투사함을 우리는 결단성이라고 이름한다(Heidegger, 1997, p.395).” 현존재는 기존과는 다른 궁극목적을 통해서 세계 내의 존재자와 타인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궁극목적에 따른 유의미성으로 세계와 관계하게 된다. 자신을 본래적 가능성에 기투하며 책임지고자 하는 결단성은 죽음으로 미리 앞서 가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종말을 향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떠맡아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으로써 한 번뿐인 이 유한한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기투한다. 이럴 때 삶은 중심을 갖고 전체로 형성되며 탄생과 죽음까지의 삶이 의미를 가진 흐름으로 이해된다. “본래적인 존재가능의 현상은 또한 입지를 확보했다는 의미의 자기의 지속성에 대한 시야도 열어준다(Heidegger, 1997, p.428).” 그들에게 퇴락하지 않은 채 자립해있고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자기 지속성을 가진 현존재는 결단성을 가진 채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관점에서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염려를 분석한 뒤 그것이 시간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서 결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앞선 죽음을 미리 가봄으로써 가능해진다. “자기의 죽음을 부단히 확신하면서, 다시 말해서 앞질러 달려가보면서 결단성은 자신의 본래적이고 전체적인 확실성을 획득한다(Heidegger, 1997, p.410).” 죽음으로 미리 앞서 가본 뒤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 존재 가능성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도래[장래]라고 한다. “탁월한 가능성을 견지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로 다가오도록 함은 도래[미래]”이다(Heidegger, 1997, p.431). 닥쳐올 죽음을 인식하는 현존재는 도래라는 시간성을 갖는다.

결단을 내려서 본래적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현존재는 이미 본래적으로 존재했던 현존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앞질러 달려가봄은 가장 고유한 기재[존재해옴]로 이해하며 되돌아옴이다(Heidegger, 1997, p.432).” 본래적 삶을 살고자 하는 현존재는 이미 기재해오던 본래적 현존재로 돌아가서 현재에서 본래적 가능성을 꽃피우고자 한다. “오직 현재화함의 의미에서의 현재로서만 결단성”은 가능하다(Heidegger, 1997, p.432). 앞선 시간으로의 도래를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런 도래는 이전 시간의 기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현존재는 도래와 기재에 기반한 결단성을 현재에서 펼쳐나간다.

이러한 개념들이 현존재의 시간성을 구성하며, 이것은 통속적 시간 개념인 미래, 과거, 현재와는 다르다. 도래는 단순한 미래가 아니고 죽음으로 앞서 가보는 것이고, 기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고 기재하던 본래성이며,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고 결단성의 현재화함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기재는 도래에서 발원하며, 그래서 존재해온 도래가 현재를 자기 자신에서부터 내보낸다”고 하며 “시간성이 본래적인 염려의 의미”라 한다(Heidegger, 1997, p.433). 현존재는 자신을 앞질러서 기투하고, 이미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는 현사실성에 속해 있고, 불안을 통해서 이미 있었던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직면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시간성은 실존, 현사실성, 퇴락을 가능하게 하고 염려를 전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의 관점에서 본래적, 비본래적 삶이 어떤 것인지 기술한다. 죽음으로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보는 결단성으로 구성되는 본래적인 실존(Heidegger, 1997, p.429)”이 본래적 도래이고 “앞질러 달려가봄이 현존재를 본래적으로 도래적으로 만드는(Heidegger, 1997, p.432)” 것이다. 기존의 통속적인 시간관인 ““미래”, “과거”, “현재”라는 개념들은 우선 비본래적인 시간이해에서부터 자라나온 것이다(Heidegger, 1997, p.433).” 비본래적 도래는 세상 사람의 기준에 따라 미래의 어떤 것을 기대하고 과거의 어떤 것을 기억하지만 본래적인 도래는 기재인 것을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현재와 본래적 현재를 구분하고 “본래적인 현재를 우리는 순간이라고 이름한다(Heidegger, 1997, p.447).” 순간은 상황 속에서 가능성을 고려하여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질러 달려가 본 도래로부터 나온 결단성은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가서 도래, 기재, 현재라는 시간성에서 고유한 자기로 살아감이다.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현존재는 이미 존재하던[기재하던] 자신의 존재 가능성으로 자기를 되돌린다. 반면 비본래적 삶은 고유한 존재 가능성인 기재를 잊고 과거를 단순히 이전의 시간으로만 받아들여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의 본래성을 망각한다. 본래적인 시간성은 현존재가 도래로 인해 기재로 사는 순간이고, 비본래적인 시간성은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의 지금이라는 현재밖에 없는 것이다(소광희, 2003).

세상 사람의 방식에서 시간은 공적인 시간이다. 세상 사람은 지구의 자전주기와 공전주기에 기반한 시간 개념으로 시간을 파악한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통해서 낮과 밤을 구분하고 하루라는 경계를 세운다. 시계의 개발 이후에는 그것에 기반한 세계시간이라는 시간관념을 갖는다. “시간은 움직이는 시계 바늘을 현재화하며 헤아리며 좇아가는 가운데서 제시되는[보여지는] 헤아려진 것”이 된다(Heidegger, 1997, p.547). 비본래적 현존재는 공적 시간의 관점에서 자기 삶을 미리 계획한다.

통속적 시간은 시계를 사용해서 시간을 계산하여 시간이 단순한 숫자들의 척도로 환원된다. 비본래적 현존재는 더 정확한 시간 측정을 요구하여 세계시간 속에서 더 효율적으로 살고자 한다. 비본래적 현존재에게 시간은 지금들의 연속이고 지나간 지금과 현재의 지금과 다가올 지금으로 남는다. “지금의 연속은 단절되지 않으며 틈도 없다(Heidegger, 1997, p.550).” 지금의 연속이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시간은 무한성이다.

“시간을 지금-연속으로 보는 통속적 시간해석에는 (…) 유의미성도 결여되어 있다(Heidegger, 1997, p.549).” 시간은 눈앞의 지금들이자 시계로 계산된 숫자로 남으면서 현존재의 시간성이 은폐된다. “시간의 성격규정이 (…) 이러한 연속에 머물고 있다면 그 연속 자체에서는 원칙적으로 시작도 끝도 발견할 수 없다(Heidegger, 1997, p.551).” 세상 사람의 시간 기준을 받아들이는 퇴락한 현존재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기에 자기 죽음을 망각하게 된다. 그것은 본래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도래의 부재이다. 비본래적 현존재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으로 이해되는 공적 시간이자 세상 사람의 시간일 뿐이다. 그런 통속적 시간의 관점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일관된 의미를 갖는 자기 지속성은 결여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절되어 버린다.

비본래적 현존재는 세상 사람의 가치에 따라 살면서 미래를 위해 몰두하며 자신의 시간성을 상실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본래적 현존재는 세계시간에 쫓기며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본래적 현존재는 도래와 기재와 순간을 통한 시간성으로 존재하기를 결단한다. 순간은 본래적 현존재에게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본래적 가능성을 펼치는 시간이므로 순간적 실존의 시간은 전체적으로 펼쳐져 있다.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은 이러한 차이를 갖는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통해서 현존재의 역사성으로 사유를 확장하고자 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실존과 구체적인 가능성을 세계로부터 얻는다.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세계 내부의 존재자와 타자와 함께 실존하는 공동존재이기에 현존재의 본래적 가능성은 세상과 동떨어진 심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존재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결단성은 (…) 넘겨받는 유산에서부터 열어밝힌다(Heidegger, 1997, p.502).” 결단성은 세계의 유산으로부터 온다. 본래적 실존은 전통의 유산을 비본래적 방식의 해석에서 벗어나 그것의 진정한 모습을 계승하고자 한다. 세간의 가치에서 벗어나 전통의 유산에 간직된 고귀한 정신을 잇고자 한다.

죽음으로 선구하여 자기만의 궁극목적을 통해서 본래적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현존재는 전통의 유산에서 존재 가능성을 상속받는다. “도래적이면서 똑같이 근원적으로 기재하며 있는 그런 존재자만이 상속된 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 전수”하게 된다(Heidegger, 1997, p.503). 현존재는 기존의 전통에서 본래적 가능성을 상속하게 된다. “존재해온 실존가능성의 본래적인 반복”을 통해서 현존재는 전통의 유산을 이어간다. “우리는 반복을 자신을 전수하는 결단성의 양태라고 특징짓는데, 현존재는 그것에 의해서 분명하게 운명으로 실존한다(Heidegger, 1997, p.504).” 본래적으로 살기로 결심한 현존재는 우연에서 벗어나서 운명을 마주하게 되고 자기만의 궁극목적으로 삶을 살고자 하는 중심을 갖는다. 현존재는 시간성을 가진 자로서 반복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자신을 넘겨받는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존재이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공동체는 생기를 갖고 있으며 본래적 공동생기를 역사적 운명이라 한다. “운명 안에 역운도 함께 근거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역운 아래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에서 일어나는 현존재의 생기를 이해(Heidegger, 1997, p.505)”할 수 있고 “운명적인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본질적으로 타인들과 함께 더불어 있으면서 실존할 때, 그의 생기는 공동생기이고 역운으로 규정된다(Heidegger, 1997, p.503).” 현존재는 역사적 운명으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현존재는 본래적 가능성을 공동체에서 전승되어 온 역사적 유산에서 발견한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에 “세계-내-존재로서 실존하고 있는 그 존재자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Heidegger, 1997, p.507). 이미 세계 안에 있는 존재자들이 역사적인 것들이고 그것과 상호관계 맺는 현존재 역시 역사성을 갖는다. 죽음으로 도래하며 기재하는 현존재만이 역사적으로 상속된 가능성을 받아들여서 자기만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으로서 본래적 시간성으로 살 수 있다.

비본래적 역사성은 운명이 은폐되어 있으며 오늘이라는 지금에 빠져 있는 나머지 과거의 것을 단순히 현재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 본래적 역사성은 앞서 보고 기재하던 본래적 가능성을 반복하여 순간으로 살지만, “비본래적으로 역사적인 실존은 그 자신에게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과거”의 유물을 짊어진 채 현대적인 것을 찾는다(Heidegger, 1997, p.511).” 이런 역사성의 비본래적 관점은 비본래적 시간성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지금으로써의 현재의 관점에서 온 것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구조인 죽음, 양심, 기투, 도래, 기재, 순간 등과 같은 구조를 가져야만 역사적 운명에 응할 수 있다. 역사성이 살아지기 위해선 그런 존재 구조를 가진 현존재가 필요하다. 현존재는 본래적 삶을 살고자 하면서 유산의 가능성을 받아들여 살게 되고 현존재의 본래적 시간성이 본래적 역사성을 가능하게 한다. 결단성은 역사에서 반복되어 전승되는 것이고 그런 본래적 반복을 통해서 현존재는 자기만의 진정한 가능성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간성과 역사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을 통해서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의 상호관계성이 드러난다. 현존재는 보통 세상 사람인 그들의 세계에 빠져 살기에 세계시간으로서 살아간다. 그런 세계시간은 단순한 숫자로 환원된 시간일 뿐 죽음으로 도래하여 본래적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가능성이 없는 시간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본래적 현존재는 자기만의 궁극목적을 갖고 삶을 기획 투사한다. 이것은 세계와 동떨어진 주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의 역사성에 기반한다. 역사적 유산에서 현존재는 운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상속한다. 현존재는 역사성에 기반한 본래적 삶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에는 세계와 자아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세계와 타인과 시간과 역사와 상호관계하고 있다.

참고문헌

Heidegger, M. (1997).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원서출판 1927)

소광희. (2003).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