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푸코는 사물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전혀 상이한 사고방식들이 있음을 간파합니다. 이는 사물의 질서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중,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린네의 생물분류법'을 배워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식물의 공통점을 가진 것을 모아 무리로 나누고 몇 가지 단계로 편성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나온다며 외웠던 <종·속·과·목·강·문·계> 등의 단계...이것이 사물의 질서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사물 대해 판단하는 방식의 예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판단 방식은 절대적이지 않고 무척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색깔 분류법(바짝 마른 풀색, 물기 먹은 풀색 등)도 한번 떠올려 보십시요―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J.L.Borges)의 단편소설에 나왔던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동물들이 다음과 같이 분류되고 있습니다. ①황제에 속하는 동물, ②향료로 처리하여 썩지 않게 보존된 동물, ③사육동물, ④젖을 빠는 돼지, ⑤물고기(漁), ⑥전설상의 동물, ⑦주인 없는 개, ⑧현재의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⑨광포한 동물, ⑩셀 수 없는 동물, ⑪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⑫기타, ⑬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⑭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푸코는 이와 같은 분류를 통해 "우리의 사유체계의 한계, 즉 그것에 대한 사유의 절대 불가능성"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즉 위의 분류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함에 있어 같은 표준으로는 잴 수 없는 엄청나게 다른 체계들을 지적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방식의 경계는 무엇인가? 현대 서구인들(또는 지금의 우리들)은 어떻게 현상을 질서지우는가?
사실 의식적 사고란 이런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이 기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 기초입니다. 이처럼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며,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 인식틀,지식)'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인식의 질서'이고, 결국은 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질서지우는 '사물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그 사물의 질서, 현상의 질서에 의해 사유의 범위를 스스로 환정하거나 허물기도 합니다.
푸코는 에피스테메의 분석을 통해서 서구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르네상스 시대: '유사성의 에피스테메' - 사물을 유사성에 의해 질서지우던 시기로 예를 들면,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호두와 뇌의 유사성에 의해 가능한 판단입니다. 또 거대한 풍차와 거인을 '거대한 몸집'의 유사성으로 동일시한 돈키호테의 사고방식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인식 가능성의 조건'을 푸코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릅니다.
둘째, 고전주의 시대: '표상의 에피스테메' - 이 시기는 16세기를 전후해서 시작하는데, 사물을 표상으로 환원하던 사고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예컨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한 데카르트가 그렇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지각된 것이다"고 말한 버클리가 그러합니다. 이를 '표상의 에피스테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표상의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표상의 에피스테메'에서는 돈키호테의 사고방식과 같은 르네상스의 인식 방식인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돈키호테의 사고방식이 고전주의 시대에 이야기된다면, '미친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일성과 차이를 분별해서 사물을 질서지우는 '이성'이 인식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며, 린네의 분류학이 보여 주듯이 동일성과 차이의 체계는 하나의 분류표로 귀착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표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요약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근대: '실체의 에피스테메' - 18세기말부터 나타나는데,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가 인식의 중심에 자리잡습니다. 예컨데 표상 외부에 있으며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체로서 칸트의 '물 자체'가 그렇고, 부(富)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이 그렇습니다. 생명이나 언어 역시 개인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관적 실체로 간주됩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노동, 생명, 언어라는 실체의 집약점이 '인간'이라는 인식이며, 그 결과 인간이 사고의 중심에 들어서게 됩니다. '인간'은 이런점에서 근대의 산물이며, 동시에 근대의 에피스테메를 집약해 주는 집약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푸코는 서로 상이한 사고의 무의식적 기초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금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동일하게 불리는 동일자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상이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선을 사실 동일자 자신의 역사를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로 고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지금 현재 포섭과 배제의 선을 긋도 있는 '이성'이란 동일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고,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단절을 통해서 생물학이나 언어학, 정치경제학 등의 담론에 나타나는 근본적 단절을 설명합니다. 즉 사물을 분절하는 담론의 규칙과 특성을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에피스테메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는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서구인 전체(현재 우리)의 사고방식을 기초지우고 있던 일종의 보편적 사고구조요, 사고의 심층적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에피스테메(episteme)의 개념을 통해 지금,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진선미의 보편적 틀이 영원불변한 진리인가에 대한 상대론적 관점에서의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영원히 옳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가정 속에는 통시대적인 불변의 절대론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희망이자 믿음이 내재해 있습니다. 역사, 시간이라는 체에 걸러지면서 거듭 그것이 진리로 규정되는 것들- 사랑, 자비- 에피스테메(episteme)의 틀이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을 때, 초월적인 진리로 명명 될 것입니다. 명명은 곧 투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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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테메 Episteme 认识型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 충북대교수 김승환)
두 명의 난장이가 등장하고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 그림은 세계미술사에 기록된 명작 중의 하나로 ‘회화의 신학’, '예술의 철학', ‘회화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 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실재와 환상,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불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난 이 작품은 1656년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완성한 [시녀들(Las Meninas)]인데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을 남긴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1599 - 1660년)는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 Foucault, 1926 - 1984)의 [사물의 질서] 첫 장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같은 제목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화가는 그의 캔버스 약간 뒤편에 서 있다. 그는 모델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첫번째 붓을 움직이지도 않았겠지만 마치 마지막 붓으로 마무리하려는 것과 같이 보인다.’ 이어 푸코는 섬세하게 화가와 캔버스와 작품의 구도와 인물들에 대하여 분석하고 설명한다. 다소 기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며, 사실적이기도 한 이 특별한 작품을 분석하면서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에피스테메는 그리스어 ‘안다(to know)’ 또는 ‘인식한다’라는 동사 επιστήμη에서 유래했는데 기술과 과학의 어원인 techne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고정된 인식과 편견이라는 의미의 독사(doxa)와 비교되는 개념이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지식의 근원이 되는 선험적인 것(a priori) 또는 지식의 담론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한 시대의 인식론적 틀이며 무의식에 잠재하여 보이지 않는 원리이다. 이처럼 푸코는 ‘사람들은 왜 시대마다 달리 판단하고 인식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사물/담론에는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의 틀 속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가 있었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표상의 에피스테메가 있었으며 근대에는 실체의 에피스테메가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푸코는 이 개념을 과학적이지만 과학은 아닌 인식의 장치(apparatus)라고 보면서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는 출간될 당시의 제목이기는 하지만 원래는 [담론의 질서]였다. 푸코의 책 출간 직전에 같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푸코는 [사물의 질서]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후 많은 학자들이 사물(thing)과 담론(discourse)의 개념에 대해서 수차례의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에서 보듯이 사물은 담론이나 정신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사물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푸코는 모든 사물/담론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거나 표상되는 현상이 있고, 내면에는 그런 현상을 가능케 하는 정신이나 사상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푸코는 현상과 본질을 연결해 주는 인식과 인지의 방식을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했다. 그러니까 에피스테메는 사물/담론의 관계들과 그 관계가 성립하는 판의 문화적 유사성과 등가성을 설명하는 또 다른 에피스테메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을 통하여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읽어내고, 담론의 질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에피스테메는 눈밭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햇빛에 녹으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시대의 내면과 심층이기도 하다. [사물의 질서]의 부제인 ‘인문과학의 고고학’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과 담론의 에피스테메는 푸코 철학의 본질이다. 한편 에피스테메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과 비교된다. 패러다임이 과학의 구조나 틀을 의미하는 반면 에피스테메는 과학담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담론이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시대를 관통하는 근원이자 원리이고 법률이자 규칙이다. 하지만 두 개념은 모두 가스통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균열(epistemological rupture)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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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테메와 독사의 차이(구별)
각자가 세상을 보는 눈이란 것은 독사이다. 즉 각자에게 보이는 것(시선.시각). 의견,인생관.세계관,신념,사상을 의미한다. 철학은 에피스테마(인식.학문)를 구별했을때 시작된다.
양자를 구별해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의 본성에 따르느냐 아니냐의 기준이다. "있는 것을 있다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것이 에피스테마다. 그런데, 존재의 본성에 따르는 주장을 하려면 존재를 알아야 한다.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은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며,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물 속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사물 속에 있는 것을 끄집에 내야 참된 앎이지, 사물 밖에서 자기 생각을 포장하는 것은 독사이다. 결국 자신의 생각인 독사(사상)와 참된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은 사물로부터 얻어진 데이타(자료)에 충실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고로, 데이타에 따르냐 아니냐가 학문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 학문은 진실이냐 아니냐하는 기준은 아니며, 진실에 가까이 가는 방법들/길들 중 가장 믿을만한 길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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