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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의 방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의식(consciousness) 에 대해 설명할 때는 간단한 형태의 지각 경험을 이용하곤 한다. 이럴 때 흔히 사용하는 예가 빨간 색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말 하나같이 빨 간색 얘기만 한다는 것이다. 왜 파란색도 노란색 도 아닌 빨간색일까? 그건 아마도 분석 철학자 프 랭크 잭슨(Frank Jackson)의 '메리가 알지 못했 던 것(What Mary didn't know)'이라는 1986 년도 논문 때문일 것이다.

메리는 색이라고는 없는 흑백의 방에서 태어났 고, 한번도 그곳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TV는 있었지만 그것은 흑백 TV였다. 메리는 색에 대한 감각을 차단당한채 그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학적 재능을 타고 난 것처럼 보 였다. 어릴적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과학에 대한 책을 읽거나 작은 실험을 하는 것을 즐겼다 성인이 되면서 그녀는 물리학과 화학, 신경과학 등을 두루 전공하게 되었으며, 특히 색 감각에 관 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 다. 그녀는 현재까지 밝혀진 빛과 색채에 대한 모 든 물리학 지식을 섭렵했다. 인간의 눈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망막에서 인식된 신경 감 각이 뇌에서 특정한 색채 감각으로 처리되는 모든 뇌과학적, 생화학적 과정을 상세하게 이해하고 있 었다. 그러나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실제의 색 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방탈출에 성공했 다.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나온 그녀는 처음으로 새빨간 토마토를 보게 된다. "아하 이것이 빨간색 이구나!" 처음 본 빨간색에 희열은 느낀 그녀는 소리쳤다. 그녀는 색에 관련된 모든 물리학적 지 식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토의 빨간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는 무엇인가가 있었 다. 이 새로운 경험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며, 잭슨의 머리 속 에서 수행된 사고 실험의 하나였을 뿐이다. 왜 그 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이야기로 논문까지 쓰 게 되었을까?

빨강은 특정한 파장의 빛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경 험이다. 우리는 빨간색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생각보다 쉽 지않다. 기껏해야 사과나 토마토, 소방차의 색처 럼 비슷한 색을 가진 사물의 예를 드는 것이 고작 일 것이다. 빨강은 대략 700 나노미터를 중심으 로 퍼져있는 파장의 빛이라고 좀 더 과학적이고 유 식해보이는 설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마져 도 그 파장과 빨강이 보여주는 색체 감각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옆에 있는 친구가 지각하는 빨간색 이 내가 보는 빨간색과 같은지 알 수 조차 없다 저 친구에게는 내가 평생 파란색이라고 알고 있었 던 색을 빨간색이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또다른 감 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의 식과 감정이 있는 로봇은 SF의 단골 소재이다보 니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이 질문 에 답한다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 선 로봇이 의식을 지녔는지 아닌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 까? 먼저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보통 의식이란 개개인이 갖는 외부 세 계에 대한 주관적 경험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현대 과학의 발전, 특히 진화론과 DNA의발견 이 후에 생물학 뇌과학 분야의 발전이 가속됨에 따라 과학자들은 어쩌면 의식의 문제도 뇌의 분석을 통 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 다. 특히 DNA의발견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크릭 이 이같은 생각의 사조를 이끌었는데, 과학자들 을 중심으로한 이런 사상을 물리주의라고 부른다.

물리주의 이전에는 유물론(Materialism)이란 것 이 있었다. 유물론도 비슷한 관점으로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정신에 관련 된 것은 무시하거나 부정했다. 유물론은 태생적으 로 주관적 경험과 정신을 설명할 수없는 한계성도 있었지만 나치즘과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색으로 인해 심하게 오염되기도 했다. 물리주의는 여기 에 적당히 거리를 두는 대안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메리의 방에 대한 사고실험은 이런 기조에서 물리 주의에 반기를 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메리 빛에 대한 모든 물리학적 지식을 알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빨강이라는 색감각을 경험 했을 때 새롭게 알게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 말은 빨강이라는 지각경험은 모두 물리적 지식으 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의식 이 물리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물리주의자 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 었다.
프랭크 잭슨은 대신 의식을 부수현상 (epiphenomenon)이라고 생각했다. 즉 의식은 복잡한 뇌기능의 활동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겨나 는 부산물 같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 한 설명 역시 큰 반향을 얻거나 의미를 얻지 못했 고, 최근 그의 대담 등을 들어보면 그같은 입장은 이미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뇌에서 의식을 찾아내기 위한 과학적 연구는 계속 되고 있다. 해가 갈 수록 보다 높은 수준의 정교한 장비가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뇌를 더욱 샅살히 뒤질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 지는 뇌와 의식의 어떠한 상관 관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자신감에 찾던 과학자들도 현재로서 는 조금은 기가 죽어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