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up, Matthias, 『현대 인식론 입문』, 한상기 역, 서광사, 2008.
Steup, Matthias, 『현대 인식론 입문』, 한상기 역, 서광사, 2008.
인식론
인식론이란 지식과 정당화된 믿음에 관한 학문이다. 인식론은 지식과 정당화라는 두 개념의 정의와 범위에 관해 탐구한다. 인식론은 다음의 네 가지 물음을 과제로 삼는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들 중 어떤 믿음들이 정당화되는가?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은 각각 지식의 정의와 지식의 범위에 관한 물음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물음은 각각 정당화의 정의와 정당화의 범위에 관한 물음이다.
많은 인식론자들은 정당화가 지식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1장의 주된 내용은 정당화가 지식에서 수행하는 역할이다.
명제적 지식
“안다”(know)는 낱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안다”는 (1) 방법에 관한 앎, 할 줄 앎(knowing how)이라는 의미, (2) 어떤 것에 익숙하다(acquaintance)는 의미 또는 (3) 문장/명제에 관한 앎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중 인식론자들이 주목하는 의미에서의 앎이란 (3)이다. 이 종류의 지식은 “어떤 것이 어떠어떠하다”라는 문장, 명제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명제적 지식이라 불린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인식론이란, 지식을 지닌 사람 S가 문장 p를 안다고 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집합을 기술하는 일이다.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서의 지식
지식에 관한 전통적 정의는 바로, 지식이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이라는 이론(JTB 이론)이다.
S가 p라는 것을 안다 ↔
(1) p가 참이다.
(2) S는 p라고 믿는다.
(3) S가 p라고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1)은 진리 조건, (2)는 믿음 조건, (3)은 정당화 조건이다. 우리는 거짓된 명제를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가 믿지도 않는 명제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더구나 참된 믿음일지라도 정당화되지 않으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3)은 요행수 추측(lucky guess)의 경우, 가령 내가 한 번호로 밀어서 우연히 맞힌 21번 객관식 문제에 관한 나의 참된 믿음 “2015년도 수능 수학 A형 21번 문제의 정답은 3번이다”를 지식으로부터 배제한다.
게티어 문제
JTB 이론은 표준적 지식 정의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게티어(E, Gettier)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지식의 충분조건이 아님을 논증했다. 게티어의 논문에 실린 반례 중 하나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미스는 존스가 포드를 장만하고 여러 해 동안 타고 다니는 걸 봐 왔으며, 따라서 스미스가 “존스가 포드를 소유한다”라고 믿는 일은 정당화된다. 그런데 스미스는 어제 배운 논리학개론 지식을 한번 써먹어보고 싶어서, 연습 삼아 자신의 믿음에다 자신의 친구 브라운에 관한 믿음을 하나 추가해서 연결사 OR(∨)와 연결해서는 새로운 믿음을 연역한다.
(1) 존스는 포드를 소유하거나 브라운이 파리에 있다.
그런데 스미스가 모르는 사이 존스는 얼마 전에 포드를 팔아치운 뒤 다른 친구에게 포드를 잠시 빌려서는 자기 차인 척 하고 있었다. 따라서 “존스가 포드를 소유한다”는 거짓이다. 그런데 스미스가 모르는 사이에 마침 브라운은 진짜로 파리에 있다. 이때 (1)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 된다. 그러나 (1)을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게티어의 반례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 의해 성립한다.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논리적으로 함의하며, S가 p로부터 q를 연역하기 때문에 p를 믿는다면, S가 q를 믿는 것도 정당화된다.
이 원리에 반대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게티어 반례는 쉽게 물리칠 수 없는 듯 보인다.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거나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게티어 문제에 대해 제시된 해결책들을 살펴보기 전에, 진리, 믿음, 정당화 개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리
진리에 관해서는 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 검증주의(verificationism), 실용주의(pragmatism) 등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각각의 이론은 진리 개념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대응론: 믿음 p가 참이다 ↔ 믿음 p가 사실 p와 대응한다
검증주의: 믿음 p가 참이다 ↔ 믿음 p가 이상적인 이성적 승인 가능성의 실례이다
실용주의: 믿음 p가 참이다 ↔ 믿음 p가 유용하다
세 가지 이론은 저마다의 문제점을 지닌다. 먼저 대응론은 믿음과 사실 사이의 대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실이 무엇인지 해명하지 않는 한 사소한(trivial) 설명으로 전락한다. 또한 사실 개념은 진리 개념과 연관 지우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대응론은 순환적 정의의 위험을 떠안을 수도 있다. 둘째로 검증론에서 말하는 “이성적 승인 가능성”은 정당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상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면서 거짓인 믿음이 왜 불가능한지가 의심스럽다. 예컨대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이상화된, 최선의 정당성을 지닌 믿음의 하나인데, 이 믿음이 거짓인 경우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재를 믿을 최선의 이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악마가 우리를 그렇게 믿도록 속일 가능성도 있다. 검증주의는 이처럼 이상적으로 정당화된 거짓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대개 회의론적인) 믿음과 대결해야 한다.1 셋째로 실용주의는, 유용하지 않으면서도 참인 믿음이 있을 수 있으며, 유용하면서도 거짓인 믿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이 입장들 중 어느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서술에서 우리는 진리와 정당화의 관계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지침을 받아들인다.
(1) 정당화된 믿음 p를 갖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p가 참인 것이 가능하다.
(2) p가 거짓이면서도 S가 p를 믿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
(1)에 대해서는, “엄준식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31,354번 배스킨라빈스 숟가락으로 순대국밥을 떠먹었다”처럼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그것을 확인해보려고 하지 않는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여전히 참일 수 있다. (2)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예를 들 수 있다. 내가 친구 A를 만났는데 숨겨진 일란성 쌍둥이 B가 내 친구 대신 나와서 당사자인 행동한다고 하자. 나는 그렇게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으므로 지금 내가 만나는 친구가 A라고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
이 두 가지 지침은 검증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검증주의의 진리 개념은 ‘이상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증주의자는 (1)의 예시는 엄준식의 유년시절부터 관찰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이상적 정당화 방식을 통해 참으로 밝혀질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2)의 예시에 대해서는 이상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정당화되는 믿음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믿음
믿음은 표준적 견해에 따르면 명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적어도
p를 믿는다
p를 불신한다
p를 보류한다(p를 믿지도 불신하지도 않는다)
라는 세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믿음에는 현행적 믿음(occurrent belief)와 상비적 믿음(standing belief)이 있다. 현행적 믿음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떠오르는 믿음을 뜻하며, 상비적 믿음은 꼭 지금 떠오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믿고 있는 믿음이다. 현행적 믿음은 상비적 믿음이거나 새로 형성된 믿음일 수 있다.
정당화
만일 JTB 설명이 옳다면, 우리는 정당화 조건이 참된 믿음을 인식화(지식화)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티어 반례는 정당화 조건이 그럴 수 없음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정당화 개념은 어떻게 특징 지워야 하는가?
어떤 인식론자들은 요행수 추측으로 참인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구분함으로써 정당화를 특징 지우려 한다. 그러면 요행수 추측을 다음처럼 정의하자.
p라는 S의 믿음은 요행수 추측이다 ↔
(1) p가 참이다.
(2) S가 p라고 믿는다.
(3) S가 p라고 믿을 증거가 없다.
이때 요행수 추측은 “p의 참이 운의 문제이다”처럼 정의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식의 정의는, 게티어 반례가 보여주듯 충분히 정당화되는 믿음조차도 단순히 운 좋게 참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앞의 반례에서 해당 믿음의 참은 브라운의 여행 계획이 바뀌었다면 거짓이 되었을 수도 있다. 게티어 반례의 경우, 스미스는 전혀 요행수 추측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믿음은 운 좋게 참이다.
요행수 추측으로 정의되는 믿음은 S의 증거로 미루어보아 참일 것 같지 않았는데도 참인 믿음이다. 반면 게티어 문제에서 나타나는 믿음은, S의 증거가 아니라 사실로 미루어보아 참일 것 같지 않았는데도 참인 믿음이다. 후자를 일단 적절하게 요행수 추측과 구별해서 ‘요행수 진리’라고 이름 붙인다면, 정당화는 참된 믿음이 요행수 추측이 되는 일을 막기는 하지만 요행수 진리가 되는 일을 막지는 못한다.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식론자는 참된 믿음이 요행수 진리가 되는 일을 막는 조건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정당화에 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당성이라는 속성과 정당화 활동
우리는 ‘정당화됨’과 ‘정당화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당성은 믿음의 속성인 반면, 정당화 활동은 믿음을 지지하는 증거나 이유를 제시하는 활동이다. 첫째, S가 p를 정당화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p는 정당화된 믿음일 수 있다. 둘째, S가 p를 정당화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p는 정당화된 믿음일 수 있다.
정당성과 증거
p의 정당성은 p의 증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철학자들은 “S가 p를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 ↔ p가 S의 증거에 맞는다”고 주장하거나, “S가 p를 믿는 일이 정당화된다 ↔ S는 p에 대해 적합한 증거를 갖고 그 증거 때문에 p를 믿는다”라고도 주장해왔다. 이 증거들의 전통적인 원천에는 지각, 내성, 이성, 기억이 있다. 이 외에도 신뢰할 만한 권위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앞의 네 가지 원천들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결정적 증거와 비결정적 증거
정당화에는 정도가 있다. 즉 상대적으로 강하게 정당화되는 믿음들과 약하게 정당화되는 믿음들이 있다. 전자에는 수학적, 논리적 공리에 대한 믿음들, 후자에는 세계나 과거에 대한 믿음들이 있다. 특히 정당화의 정도는 결정적 증거와 비결정적 증거를 척도로 구별될 수 있다. 결정적 증거는 믿음의 참을 보장하며, 따라서 인식자에게 완전한 확실성을 제공한다. 반면 비결정적 증거는 믿음의 참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존재한다”라는 믿음은,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결정적 증거를 통해 참이 된다. 한편 “내 앞에 책상이 있다”라는 믿음은 내가 내 책상을 보는 경험을 증거로 갖는데, 이는 결정적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통 속의 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2
연역은 진리보존적(truth-preserving)이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부터 연역된 믿음 역시 결정적으로 참이다. 한편 연역에 의해 도출된 믿음은 전제들 이상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비결정적 증거로 정당화된 믿음으로부터 연역된 믿음들은 여전히 비결정적으로 참이다.
정당화와 논파가능성(defeasibility)
믿음의 정당성은 증거 체계의 변화에 따라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내가
(1) 나는 초록색 종이를 보고 있다
라는 증거로부터
(2) 이 종이는 초록색이다
를 믿는다고 할 때,
(3) 조명이 초록색이다
라는 새로운 점이 알려진다면 나의 믿음은 정당성을 상실한다. 새로이 발견된 점은 나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증거를 논파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증거적 논파(evidential defeat)의 정의이다.
d가 p에 대한 증거 e를 논파한다 ↔
e는 p의 증거이지만 d와 결합되었을 때에는 p의 증거가 아니다
증거적 논파는 모순적 논파자(contradicting defeater)와 약화 논파자(undermining defeater)의 두 가지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 d가 p의 거짓을 정당화할 때 d는 모순적 논파자이며, d가 p의 거짓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p가 참이라고 믿을 정당성을 무너뜨릴 때 d는 약화 논파자이다. 물론 논파자가 다시 논파될 수도 있으며, 그 경우 p의 정당성은 회복된다.
논파 가능성과 게티어 문제
논파 가능성의 개념을 가지고 보면, 게티어 문제는 정당성이 증거가 아닌 사실에 의해서도 논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단 증거적 논파와 사실적 논파를 구분할 수 있다. 증거적 논파는 다음처럼 정의된다.
d는 믿음 p에 대한 S의 정당화를 증거적으로 논파한다 ↔
(1) S가 p를 믿는 증거 e를 갖는다
(2) S가 e를 논파하는 명제 d의 증거 e′를 갖는다
사실적 논파는 다음처럼 정의된다.
d는 믿음 p에 대한 S의 정당화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
(1) S는 p를 믿는 증거 e를 갖는다
(2) S가 그에 대한 증거를 갖지 않으면서, 참이면서, e를 논파하는 명제 d가 존재한다
믿음이 S에게 증거적으로 논파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믿음에 대한 S의 증거를 논파하는 숨겨진 사실이 있다면, S의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해도 S의 믿음이 지식이 되지는 않는다.
나아가 인식화 정당화와 비인식화 정당화를 구분해야 한다. 인식화 정당화는 증거적 및 사실적으로 논파되지 않은 정당화이다. 비인식화 정당화는 증거적으로 논파되지 않았지만 사실적으로 논파된 정당화이다. 인식화 정당화는 참된 믿음을 인식화하는 반면, 비인식화 정당화는 인식자의 범위를 벗어난 이유들로 인해 정당화를 약화하고, 따라서 참된 믿음을 인식화하지 못한다.
게티어의 사례에서, 스미스는
(1) 존스가 포드를 소유한다
라는 믿음으로부터
(2) 존스는 포드를 소유하거나 브라운이 파리에 있다
를 연역한다. 그런데 (1)은
(d) 존스의 포드는 빌린 것이다
때문에 참이 되지 못한다. d는 (1)의 모순적 논파자이지만 스미스는 d의 증거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d는 (2)의 정당성 자체를 논파하지는 않지만, (2)의 정당화를 비인식화 정당화로 만든다. 즉 인식화 잠재력(epistemizing potential)을 소멸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경우 스미스의 (2)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정당화되었지만 지식이 아니다.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패한 시도
논파 가능성 개념을 통해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해결책은 JTB 이론에 다음의 조건을 추가한다.
C1: p에 대한 S의 정당화는 어떠한 거짓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조건은 “존스가 포드를 소유한다”라는 거짓 전제로부터 연역된 믿음을 지식으로부터 배제하므로, 원래의 게티어 반례를 배제할 수 있다.
그런데 C1을 충족시키면서 지식이 아닌, 변형된 게티어 반례를 제시할 수 있다. 예컨대 창밖 뜰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내 고양이가 뜰에 있다”고 믿는다고 하자. 내 고양이는 으레 뜰에 있는 경우가 많으며, 나는 현재 고양이와 매우 흡사한 것을 보고 있고, 이것을 의심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사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홀로그램이다. 그리고 내 고양이는 실제로 뜰에 있는데, 창 바로 밑에 있어서 내가 볼 수 없다.
이 사례에서 나는 거짓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믿음을 정당화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은 고양이 홀로그램에 대한 지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지 거짓 명제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이나 거짓은 명제의 속성일 수는 있지만 비명제적인 경험의 속성일 수는 없다.
게티어 문제에 대한 논파 가능성 해결책
게티어 문제에는 무수히 많은 접근 방식이 있지만, 이 중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 그 중 하나인 논파 가능성 해결책은 다음의 조건을 추가한다.
C2: S의 믿음 p의 증거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d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조건을 원래의 게티어 반례에 대해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스미스의 믿음은 C2를 충족하지 않으며, “존스의 포드는 빌린 것이다”인 d는 스미스의 정당화를 비인식화 정당화로 만든다. 또 변형된 게티어 반례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홀로그램이다”라는 사실 d가 내 증거의 사실적 논파자로 작용하므로 C2를 충족하지 못한다.
C2는 S가 갖는 증거 체계 전체를 고려해서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믿음 p의 증거가 두 가지이고, 둘 중 한 가지 증거만으로도 p를 (인식화)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면, 증거 하나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d가 존재한다고 해서, 즉 C2가 충족된다고 해서 p가 지식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지식에 대한 JTB 설명의 수정안
논파 가능성 접근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진리, 믿음, 정당화에 ‘사실적 논파의 부재’를 추가한다. 이에 따르면 지식 정의는 다음과 같다.
S는 p를 안다 ↔
(1) p가 참이다
(2) S가 p를 믿는다
(3) S가 p를 믿을 정당화 증거를 갖는다
(4) S의 p에 대한 증거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명제 d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조건 (4)는 (1)과 중복된다. 만일 p가 거짓이라면, p의 정당성을 모순적으로 논파하면서 참인, 즉 ~p를 함축하는 d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d는 p의 증거를 항상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d가 p에 대한 증거 e를 논파한다 ↔
e는 p의 증거이지만 d와 결합되었을 때에는 p의 증거가 아니다
e가 무엇이 되었건 d로부터 ~p가 성립하므로, e는 p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수정안 설명은 다음처럼 기술되어야 한다.
S는 p를 안다 ↔
(1) S가 p를 믿는다
(2) S가 p를 믿을 정당화 증거를 갖는다
(3) S의 p에 대한 증거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명제 d가 존재하지 않는다
1. 주지하듯 퍼트남은 이런 종류의 의심에 대해 통 속의 뇌 반대 논증을 제시한 바 있다.
2. 어떤 철학자들은 결정적/비결정적 구분에 대한 슈토이프의 이런 식의 (널리 통용되는 설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에 반기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Steup, M., 『현대 인식론 입문』, 제1장 「지식과 정당화」|작성자 김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