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 가문의 육훈
경주최부자집 가훈1926년 10월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고분 하나가 발굴되고 있었다.발굴 단원 중에 파란 눈의 신혼부부가 끼어 있었다.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 부처였다.고고학에 관심 많은 황태자가 동양에 신혼여행 왔다가경주에서 발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서 배를 타고 온 길이었다.훗날 스웨덴 국왕이 된 황태자는 그 때 머물렀던 고분 근처 한 양반 집안의 사랑채를 잊을 수 없었다.아담하고 운치있는 건물,향긋한 내음의 법주(法酒),금빛 나는 놋그릇에 담겨나온 정갈한 음식….누군가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그는 물었다.“경주 최씨네 사랑채에는 지금도 사람이 많은가요?”▶경주 최씨네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꾼으로 내려온 집안이었다.단지 부자였을 뿐 아니라‘사방 백 리(약 40키로미터)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통해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실천에 옮겨 존경 받았다.찾아오는 과객(손님)은 귀천(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 하라’도이 집안이 지키는 여섯 개의 가훈(六訓) 중 하나였다.▶손님이 많을 때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해서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을 손님 접대에 썼다.손님이 떠날 때면 과메기 한 손(두 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어보냈다.▶최부잣집은 재산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는 철칙도 갖고 있었다.혹시 논을 더 샀더라도 재산이 1만 석을 넘지 않으려면 소작료를 낮춰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그만큼 소작료가 떨어지기 때문에최부자네가 땅 사는 걸 배 아파하기는커녕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원효대사와 사랑을 나눈 신라 요석공주의 궁터에 있던 최부잣집 사랑채는 1970년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상태다.이걸 경주시가 복원해 한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를 상징하는 관광명소로 꾸미겠다고 밝혔다.최부잣집의 재산은 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으로 많이 쓰이고나머지는 광복 후 교육 사업에 들어가 지금은 집도 후손들 소유가 아니다.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이 시대에 이어갈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다.'부자 3대를 못 간다.' 는 말이 있다.그러나 경주 최부잣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무려 300년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가졌고마지막에는 1950년,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그동안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최부잣집 가문이 지켜 온가훈은 오늘날 우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1. 진사(제일 낮은 벼슬.단순 명예직.)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2. 재산은 1년에 1만석(약 5천 가마니)이상을 모으지 말라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했다.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사지 말라.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3년동안 비단옷을 입히지 마라.)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중에서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최준(1884-1970)의 결단은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입니다.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잊지 않았다고 합니다.“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한 곳에 모아 두면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거름이 되는 법이다.”
[경주 최부잣집]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
‘부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300년의 비밀
경주 최부잣집을 생각하면 두 가지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는 최준씨(오른쪽) 형제, 왼쪽의 동생 최윤은 형을 위해 대신 일본참의가 되는 오명을 뒤집어써 해방 뒤 반민특위에 끌려가기도 했다.(사진/ 황금가지 제공) |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 최부잣집 창고.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800석이 들어간다는 경주 교리의 이 창고문이 열렸다. |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 더구나 전란과 민란, 외침, 식민통치, 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 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 최부잣집 경주 고택의 안채 모습. (사진/ 황금가지 제공) |
전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 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 부산에 있던 백산상회 모습.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이 사장을 맡은 백산상회는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보내는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사진/ 황금가지 제공) |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 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 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 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 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 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 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 경주 최씨 사성공파 가문파 11대 최현식의 회갑연 모습. (사진/ 황금가지 제공) |
1)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1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2) 그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5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로스차일드? 엘리자베스? 록펠러? 빌 게이츠? 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선 당연히 경주 최부잣집이 메달 후보에 들어가지 않을까?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경주 최부잣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