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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지향 원리[ Anthropic Principle ]

한국농촌희망연구원장 2022. 9. 14. 09:56

수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탄 문필가로 이름이 높은 버트런드 러셀이 전하는 일화입니다.

그가 한번은 학식 있는 등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등산가는 히말라야의 몇 개 봉우리를 올랐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은 인간이 오르기 딱 알맞게 만들어졌다. 암벽을 타다 보면 다 자란 성인에게 필요한 거리, 딱 그 거리마다 발 디딜 데가 있고 움켜쥘 곳이 있다. 만약 인간의 몸집이 지금의 두 배였다면 기존 등반 코스는 너무 쉬워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산을 오르는 일은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할 것이다.”

참 낙관적이고 조물주에 대한 감사로 충만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대자연에 대한 오만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밤과 낮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잠을 선사하기 위한 것이요, 사계절이 있는 것은 다양한 레저 활동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곡식과 가축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함이요, 들판에 꽃이 피는 것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심술궂은 조물주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생로병사라는 고통을 안기었고,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다르게 만들었으며, 교만의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지진과 홍수로 인간의 자만을 쓸어가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 본능은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적 위안이나 불평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최고 지성을 가진 천문학자들 역시 동일한 논리를 적용합니다.

‘인류 지향 원리(Anthropic principle)’란 1974년 천문학자인 브랜든 카터(Brandon Carter)가 처음제시했으며, 역시 천문학도이자 인기 있는 과학 저술가인 존 배로(John Barrow)나 폴 데이비스(Paul Davies) 등의 저술을 통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알다시피 광대한 우주에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지구의 경우 만약 태양에 좀 더 가까웠다면 자외선의 독성 때문에 생명이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요, 좀 더 멀었다면 태양 에너지가 충분치 않아 역시 생명이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생명 탄생에 딱 맞는 적당한 거리입니다. 이를 ‘골디록 원리(Goldilocks principle)’라고도 합니다.

기적은 단순히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뿐만이 아닙니다. 양자 역학의 모든 이론은 플랑크 상수(h=6.626068×10-34 ㎡㎏/s)라는 신비한 수에 달려 있습니다. 이 숫자보다 작은 차원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역학의 모든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상수가 현재의 값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물론 어떤 생명체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력의 크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37억 년 전 빅뱅을 통해 우주가 태어났을 때 우주의 중력이 지금보다 컸다면 모든 것은 블랙홀로 흡수되어 아무것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보다 작았다면 소립자들이 서로 뭉치지 못해 수소 이외의 다른 원소는 생겨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류 지향 원리를 주장하는 천문학자들은 물리 법칙의 모든 상수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교묘히 맞춰져 있는 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진화론과의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는, 미국 개신교를 중심으로 등장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역시 같은 논리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생물체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도저히 우연에 의한 돌연변이나 자연 선택에 의한 점진적 수정만으로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결국 생명체, 특히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상위 법칙, 즉 신의 의도적 설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논리적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 자연 현상의 관찰
(2) 현상의 원인에 대한 자연적, 과학적 원인의 추측
(3) 추측된 원인만으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리 없다는 믿음
(4) 추측된 원인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근거로,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거나 신비적 요소를 포함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
(5) 새로이 설정된 이유가 옳은 증거로, 자연적 원인을 ‘믿을 수 없음’을 내세움

(1) 생명체, 특히 인간은 복잡하다.
(2)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가 인간 존재의 원인일 것이다.
(3) 그러나 그렇다고 믿기는 어렵다.
(4) 그렇다면 신의 지능이 목적을 갖고 인간을 설계했을 것이다.
(5) 진화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지적 설계론이 참인 증거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성서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 없을진 몰라도, 많은 물리학자들은 광활한 우주에 예외 없이 통용되는 물리 법칙이 우주를 넘어서는 미지의 ‘차원’에 의해 정해졌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칙이 오로지 인간을 번성시키기 위해 정해졌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요. 이는 히말라야의 산들이 등반의 즐거움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버트런드 러셀의 지인과 다를 바 없는 오해일 뿐입니다.

기후 급변과 환경 위기 속에 내일이 불안정한 지금, 우리에게는 자연이 우리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우쭐해하는 것보다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감사하는 일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 자연과 우주는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쇼가 아니라, 인류를 너그러이 품 안에 안아준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자연이 우리 목적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의 목적에 봉사해야 함을 항상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