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잉여(consumer surplus)

경제학에 소비자잉여(consumer surplus)라는 개념이 있다. 소비자잉여란 어떤 상품의 일정량에 대하여 소비자가 실제로 치르는 대가와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가치와의 차이를 소비자잉여라 한다.
예를 들어 소비자는 1000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800원에 구입하는 것을 말한다. 즉 기꺼이 1000원을 지불하고도 구매할 용의가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800원에 구매할 수 있을 때 그 차이, 즉 200원을 소비자잉여라 한다.
이때 소비자는 판매자의 희생으로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교환이 이루어질 때 한쪽이 이득을 보는 만큼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같이 이득을 본다.
즉 소비자는 소비자잉여를 얻고 공급자는 생산자잉여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서로 잉여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잉여는 우리가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발생한다. 만일 매우 똑똑한 몇 사람만 살고 있다고 하자. 그들은 현재의 가격으로 상수도를 사용할 수 있을까?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커다란 재래시장이 존재할까? E-Mart가 들어와서 장사를 할까? 은행이 있을까? 기차역이 존재할까? 우체국이 있을까? 소방서가 있을까? 큰 병원이 있을까?
이와 같이 우리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기 때문에 계산할 수 없는 규모의 소비자잉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잘난 사람들이 보기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 잘난 사람에게 이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서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모두 이득을 주기 때문에 존중되고 배려되어야 한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은 잉여를 향유하고 있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원시적인 무인도에 옮겨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부동산투기를 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부를 과시하며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을까? 호화로운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을까? 지식을 과시하며 고관대작이 될 수 있을까?
많은 돈을 벌기는커녕 자기가 입는 옷이나 신발도 만들지 못하고 제대로 식품도 구하지 못하는 원시인에 불과할 것이다.
현대경제학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으며,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힘으로 사업을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기업의 창립자도 실은 수많은 사람들과 모든 사회제도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었던 것이며, 그 사업이라는 것도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의 공동의 산물인 방대한 기구와 시장, 그리고 사회전체적인 분위기의 혜택 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 사회적인 요인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풀뿌리와 열매와 작은 생물과 곤충을 먹으면서 목숨을 이어가는 벌거벗은 야만인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의 가족 및 친․인척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 전체, 그리고 모든 인류가 나에게 이득을 주고 있고, 나 또한 그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한 배에 타고 있다(We are in the same boat). 따라서 배타적 이기주의는 나를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